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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May 05. 2022

낙서, 산책

2022/05/05


  삼 일간 두통에 시달렸다. 흔한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 날씨 좋은 날 누워만 있는 것에 살짝~쿵!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해가 진 뒤 타이레놀 두 알 꿀꺽하고 모자 하나 눌러쓰고 얇은 점퍼 하나 걸치고 저녁 마실 나선다.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지. 호기롭게 벗고 나간 마스크. 하지만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마스크 on.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펴는 것까지 눈치를 살피고 다니는 ‘나’라는 녀석이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순간. 하나둘씩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길에 ‘어이쿠 깜짝이야’ 시늉 한 번 보여주고 주머니에서 호다닥 마스크를 꺼내 쓴다.   

  

  공원에 도착해서야 겨우 마스크를 벗자 물가 따라 불어온 선선한 밤공기가 입가에 흐른다. 그 공기 따라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지나간다. 스쿠터 한 대가 공원을 달리며 기름내를 풍긴다. 그랬지. 마스크 없이 걷는다는 게 이런 거였지. 내 입 냄새 맡는 것보다야 훨씬 낫군.     


  홀로 공원을 누비며 알록달록한 LED 조명 수 놓인 명물 구름다리 한 번 건너 주고 콧소리 내며 서로 좋아 죽는 중년 커플 보며 나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자상한 미소 한 번 지어 주고 벤치에 앉아서 한데 묶여 둥둥거리는 오리 보트 바라보며 무알콜 맥주 한 캔 마셔주니 달 밝은 봄밤, 제법 기분 좋다. 아이 손을 잡고 산책하는 아저씨. 어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아줌마. 저들 모두 나와 비슷한 기분이겠지. 저마다 모두 그 순간에 의미가 있는 거겠지. 결국 저런 작은 순간을 많이 모아야 하는 것이 삶이겠지. 다들 즐겁게 사는구나. 다행이다.      


  그런 순간. 그런 삶. 결국 내가 갖고 싶은 건 결국 그런 것들이지,하면서도 나는 정말 그런 것들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인 스스로 묻는다. 아직은 모르겠다. 삶이란 결국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과 그 깊이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크기를 비교하려 드는 나를 발견한다. 사유가 부족한 자는 결국 남의 철학에 기대게 된다. 가끔 어떤 이들은 감히 다른 이의 삶을 판단하며 크다 작다 말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어찌 비칠지 스스로 되물어볼 만한 말이다. 내가 그런 존재일까 두렵다. 나라는 놈이 그 깊이는 얕은 주제에 그 넓이만 자랑하는 자가 아닐지 걱정스럽다. 한때의 나는 그랬기에 더 그렇다. 결국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 그런 사색.      


  그런저런 잡념 끝에 산책이 끝나간다. 작은 공원 한 바퀴 정도야 걷다 보면 뚝딱이지. 봄바람 때문일까. 즐거운 이 밤이 너무 짧다. 아쉽다. 두통이 없어졌구나. 다행이다.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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