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일간 두통에 시달렸다. 흔한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 날씨 좋은 날 누워만 있는 것에 살짝~쿵!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해가 진 뒤 타이레놀 두 알 꿀꺽하고 모자 하나 눌러쓰고 얇은 점퍼 하나 걸치고 저녁 마실 나선다.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지. 호기롭게 벗고 나간 마스크. 하지만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마스크 on.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펴는 것까지 눈치를 살피고 다니는 ‘나’라는 녀석이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순간. 하나둘씩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길에 ‘어이쿠 깜짝이야’ 시늉 한 번 보여주고 주머니에서 호다닥 마스크를 꺼내 쓴다.
공원에 도착해서야 겨우 마스크를 벗자 물가 따라 불어온 선선한 밤공기가 입가에 흐른다. 그 공기 따라온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지나간다. 스쿠터 한 대가 공원을 달리며 기름내를 풍긴다. 그랬지. 마스크 없이 걷는다는 게 이런 거였지. 내 입 냄새 맡는 것보다야 훨씬 낫군.
홀로 공원을 누비며 알록달록한 LED 조명 수 놓인 명물 구름다리 한 번 건너 주고 콧소리 내며 서로 좋아 죽는 중년 커플 보며 나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자상한 미소 한 번 지어 주고 벤치에 앉아서 한데 묶여 둥둥거리는 오리 보트 바라보며 무알콜 맥주 한 캔 마셔주니 달 밝은 봄밤, 제법 기분 좋다. 아이 손을 잡고 산책하는 아저씨. 어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아줌마. 저들 모두 나와 비슷한 기분이겠지. 저마다 모두 그 순간에 의미가 있는 거겠지. 결국 저런 작은 순간을 많이 모아야 하는 것이 삶이겠지. 다들 즐겁게 사는구나. 다행이다.
그런 순간. 그런 삶. 결국 내가 갖고 싶은 건 결국 그런 것들이지,하면서도 나는 정말 그런 것들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묻는다. 아직은 모르겠다. 삶이란 결국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과 그 깊이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크기를 비교하려 드는 나를 발견한다. 사유가 부족한 자는 결국 남의 철학에 기대게 된다지. 가끔 어떤 이들은 감히 다른 이의 삶을 판단하며 크다 작다 말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어찌 비칠지 스스로 되물어볼 만한 말이다. 내가 그런 존재일까 두렵다. 나라는 놈이 그 깊이는 얕은 주제에 그 넓이만 자랑하는 자가 아닐지 걱정스럽다. 한때의 나는 그랬기에 더 그렇다. 결국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 그런 사색.
그런저런 잡념 끝에 산책이 끝나간다. 작은 공원 한 바퀴 정도야 걷다 보면 뚝딱이지. 봄바람 때문일까. 즐거운 이 밤이 너무 짧다. 아쉽다. 두통이 없어졌구나. 다행이다. 2022/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