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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May 17. 2022

낙서, 가난한 사람들

2022/05/17


  며칠씩 핸드폰만 봐요. 세상살이가 다시 귀찮아져요. 스님 말씀도 잘 들어오지 않아요. 환경오염이 심해진다는 뉴스를 보던 사람들이 겁이 난대요. 스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으니,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 그냥 살아야지. 뭐. 석범이 형이 운영하는 체육관은 아마추어 메달을 긁어모은대요. 국제심판 사진들을 보내오며 프로 안 할 거면 와서 체육관이나 도와달래요. 프랑수아는 결국 미국에서 시민권 따서 커밍아웃한 태민이랑 같이 잘 산답니다.


  티비를 보면 가끔 세상이 무섭게 느껴져요. 엉망진창 살다가 유학 다녀와서 사람 싫어지고 뻔뻔하게 숨 잘 쉬고 사는 나 같은 호로새끼보다 더러운 놈들이 널린 게 세상인데 내가 못 살 이유는 뭔가 싶기도 하고. 쌓여가는 습작을 보며 나 같은 놈도 글쟁이는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고. 문 닫은 체육관은 도대체 어디로 갔길래 나는 계속 프로가 못 되는 건지. 혹은 내 속 어딘가에 또 숨겨놓은 핑계거리가 있는 건지. 이따위로 살면서 해인사와 금산사 사진을 나란히 놓고 어디 시설이 더 좋은지 비교하고 있는 내가 어이없지요.


  우아한 의자에 앉아 예쁜 색의 술잔을 바라보고 사진이나 찍어대면서 머리를 텅 비우고 매번 똑같은 쓰레기로 그 속을 다시 채우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머리로 비싼 시계를 자랑한 뒤 아침마다 숙취로 변기를 붙잡고 다 쏟아내며 살아볼까. 부모님은 늙으셨지만,  많은 분들이니 그 분들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용이는 자리를 잡아가고 좋은 차를 타고 예쁜 부인 태우고 안전 운전하고. 디에고는 고향 투스카니로 돌아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페인트 회사를 물려받아 빨간색 차 사진을 올려대지요. 진호네 식당은 잘되는 건지 인터뷰에서 어쩌고저쩌고 거리면서 마시시도 않는 와인을 보내와요. 망할 놈이.


  형철이가 들려주는 동규와 의령이 소식도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들. 태준이 녀석은 잘 나가던 핸드폰 매장 정리하며 나한테 재고폰 덤터기를 씌우려고 하는데 그게 녀석답네요. 시원이 놈이 뿌려진 나무는 얼마나 컸는지 아무도 몰라요. 김진방송국에 취직해서 자서 잘 살고 있지요. 강한 사람이에요. 오랜만에 안부 묻는 고다 형은 아파트가 30억이 됐다고 웃어대네요. 난 마흔이 코앞인데 흔들거리면서 사는 게 뭐가 이리 우스운지 혼자서도 잘 웃고 다니죠. 앞으로도 이렇게 밥 많이 먹고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마흔 되면 혼할래요. 딴따라 포기하고 딸에게 우쿨렐레 연주해주는 낙으로 사는 성호같이, 프사에는 맨날 낚시 사진 올려대는 친구 녀석들 마냥. 여든으로 글쟁이 돼서 책을 내고 그림배우는 혜선이네 엄마처럼 살래요.


  어제도 밥 많이 먹고 잠들지 못하게 계속 말을 걸고 짧은 머리를 쓰다듬고.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니 당신이 없어요. 냉장고를 열어보니 알루미늄 포일에 인 샌드위치랑 메모 한 장. 너와의 한 때.  한 때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  글과 샌드위치는 조금 차가웠지만, 소스는 좀 많았지만, 그대로 좋았어요.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너의 골목 동네. 의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시던 할머니 두 분과 눈을 마주치고.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톡을 남겼어요.  우리 무조건 행복하자고요.  그렇게들 사는 거니깐, 우리 행복하자고요.

  2022/05/17


김일두 -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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