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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May 19. 2022

짧은 습작, 너의 머디워터스

2022/05/19


  “혹시 군인이세요?”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던진 사적인 질문이었다. 손에는 일회용 종이컵이 들려있었다. 상황판단이 느린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녀를 멀뚱하니 쳐다만 봤다. 내 손에는 커피가 반밖에 남지 않는 투명한 유리잔이 들려있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이나 사라진 커피.

  “아닌데요”

  “죄송해요. 머리가 짧아서요”

  '군인'은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단어이다. 내가 국어사전 편찬 작업을 한다면 제일 먼저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제 처음 갔던 미용실에서 너무 짧게는 안 된다는 말 한마디가 뭐 어렵다고 나는 눈만 끔뻑거리며 내 머리가 망가지는 걸 구경만 했던 걸까. 그나저나 방금 나의  대답이 너무 퉁명스럽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여기 몇 번 오셨었죠? 이거 제가 먹는 간식인데 좀 드시라고요”

  키보드 옆으로 자색 고구마 칩이 담긴 종이컵 하나가 올라왔다. 고맙다는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뒤돌아서 계산대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 친절한 알바생이네, 라고 생각하며 입에 넣은 고구마 칩은 굉장히 바삭거렸고 적당하게 담백해서 좋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은 내가 유일했다. 그곳은 항상 그랬다. 언제나 손님이 적거나 없었고 한 군데에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손놈은 내가 유일했다. 그녀의 짧은 머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고구마 칩 이후 어느날,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홀앤오츠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취향 사장의 취향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고른 음악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곳의 음악은 항상 적당하게 작은 소리로 흘렀고 웬만한 곡이 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것이 다방이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리는 그곳과 잘 어울렸고 자색 고구마 칩의 담백함도 마음에 들었었으니깐. 주문대에서 그녀와 마주쳤을 때 머리의 색이 바뀌어있다는 걸 눈치챘다.

  “머리 색이 바뀌었네요?”

  내가 묻자 그녀가 재빠르게 머리를 귀 뒤로 두 번 연속으로 넘겼다. 왜 굳이 눈을 피할까 싶었지만 이내 다시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고 간단하게 답해주었다. 라 한 잔을 시켰고 자리에 앉았다. 친절한 짧은 머리의 그녀는 내 자리까지 커피를 직접 가져다줬고 지난번에 먹은 고구마 칩이 먹을 만했는지 내게 물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또 한 번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번에는 옅은 미소를 내비쳤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는 손가락과 목선이 예쁜 법이다. 나는 작은 확신이 생겼고 매장을 나오는 길에 번호를 남겼다. 그 밤, 그녀는 나의 조급함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톡을 보내왔다.     


    데이트 약속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애당초 내가 남긴 메모는 냅킨에 볼펜으로 갈겨 쓴 전화번호와 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글이 전부였다. 약속 장소는 조금 더 카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어린 그녀의 나이에 놀랐고 그녀는 나의 나이에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어렸다. 마스크를 벗은 그녀는 볼을 조금 붉어져 있었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인중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인중이 선명한 사람은 입술 선이 예쁜 법이지. 그래도 너무 어려.

  그녀에게 카페의 음악은 누가 고르는 건지 물었더니 자신이 선곡한다고 했다.

  “그럼 가끔 나오는 델타 블루스 곡들도 직접 고른 거예요?”

  “윌리브라운이랑 머디워터스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고 그녀의 나이를 의심했다. 그 나이에 그런 걸 틀어대니 커피숍에 사람이 없지. 내가 놀란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답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약간 수줍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블루스를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고 하잖아요”

  첫 만남에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대는 사람이었다. 뻔뻔함이 보통 아니다. 저런 거 나는 톡으로도 못 보낼 듯한데 말이지.

  “쳇 베이커?”

  “맞아요!”

  그 대사에서 뒤에 빠진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기뻐하는 그녀를 굳이 민망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만난 그녀는 느낌이 꽤 달랐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던 탓도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 않았고 화장을 한 채 한 쪽 귀로만 넘긴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려서 꽤 멋져 보였다. 우리는 자색 고구마-오키나와 가봤어요? 거기 특산물이라는대-의 담백함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커피숍에서 나오던 그녀의 선곡-왜 옛날 음악만 들어요-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서로의 짧은 머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녀의 인중과 뻔뻔함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어떻게 먼저, 그것도 군인이라는 질문이랑 고구마 칩으로 말을 걸어요? 뻔뻔함에 관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의 소심함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진짜 소심한 사람은 번호를 남기지 못하고 인중 칭찬 같은 건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내가 뻔뻔한 사람이었다면 핸드폰을 들이밀고 직접 번호를 찍어달라고 했을 거라고 반박했다. 그리고는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겠죠. 그녀가 조금 수긍하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짧은 머리를 몇 차례 쓸어내렸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는 눈매와 손가락과 목선이 예쁜 법이다. 우리는 적당히 이야기를 하고 일어났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커피를 그녀는 절반이나 남았다며 아까워했다. 그녀는 나에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녀는 황당해하며 나에게 물었다.

  “왜요? 설마 오늘 별로였어요? 저녁 약속도 없다면서요. 내가 살 테니 같이 먹어요”

  역시 뻔뻔한 여자다. 2022년의 이퀄리스트.

  그녀는 콜라와 닭갈비를 사줬고 밥까지 볶아 먹은 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화가 난 듯이 나에게 먼저 톡을 보내왔고 우리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왜 연락 안 했어요?”

  정말 대단. 난 저런 거 절대 못 물어본다.

  “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연락이 없으면 그냥 아닌가 보다 하고 끝나지 않나요 보통은”

  “한 번 더 만나볼 만큼은 됐다고 생각했죠”

  나는 그녀에게 우리는 적당히 비슷한 듯 다른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우리 나이 차이도 꽤 나잖아요. 그녀가 가볍게 웃는다. 그게 뭐 어째서요?

  “난 결혼을 한 번 했어요. 지금은 혼자이긴 한데. 게다가 여자도 엄청 많았어요.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요”

  그녀가 잠시 무표정을 보이더니 살짝 콧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게 뭐 어쩌라고요? 머리가 살짝 찰랑댄다. 참 잘 어울리네, 짧은 머리. 옆 자리의 남자가 몇 번인가 그녀를 힐끔 대는게 보였다. 갈수록 엄청나네, 이 사람. 커피는 또 어느새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에게 그녀가 커피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절반이나 남았는데 안 가져가요?”

  아, 이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이를 떠나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 긍정성이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눈인사를 살짝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톡 하면 답장해요”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 머디워터스의 팬을 자청하는 사람이니 오죽하겠는가 싶었다. 다시 자리에 앉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내 인중을 좋아하고 나는 오빠의 눈매가 마음에 드니깐 이거 꽤 괜찮은 만남이에요. 다음에 저 일하는 데로 와요. 자색 고구마 칩 준비해놓을게요”

  정말인지 마지막까지 감탄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 정확히 절반이 담겨 있던 커피는  고작 한 모금만에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뭐가 재밌는지 그녀가 살짝 소리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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