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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May 23. 2022

폐관수련 갑니다

문학의 이해 - 코스모스 사운드

  "네가 지금 그러고 사는 거. 그것도 결국 전혜린 같은 삶 아니겠어?"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어느 쪽으로든 전부.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진. 해방 직후 서울의 치열한 삶들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던 부유한 친일파 집안의 자제, 60년대 독일 유학파 문학소녀의 우울 같은 거 요즘 누가 공감해주겠어?"

  "전혜린은 공부라도 잘했지 쓰읍. 그래도 룸펜 한가운데에서 삶 고찰 한 그녀의 철학은?"

  "결국 주정뱅이의 종잇장 위 잉크 놀음일 뿐이지. 그녀가 결코 희생의 숭고함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행이랄까. 그녀도 걷는 것을 좋아했다. 긴 새벽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언제 보아도 예쁜 달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달이 밝아 있다. 어찌나 밝은지 밤하늘을 짙은 남색으로 물들이는 달이었다. 습작을 시작한 지 수개월, 무지성으로 쌓인 몇 개의 단편. 각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총 500매 정도. 어디에도 올린 적 없는 이야기 대략 90,000자.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다. 정확히는 우리의 이야기. 나는 자신이 없다 말했다. 네가 만족할만한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냐는 나의 말에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우리가 미덕이라고 부르는 가치들은 실제로 행할 때 조금 더 커지고 확산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그 가치를 갖는다"

  "누구야 그건?"

  "아리스토텔레스"

  "넌 정말 별 걸 다 아는구나"

  "좋은 삶이란 결국 좋은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끊임없이 글을 쓰면 되는 거야. 박수를 받던 비난을 받던 그런 평가들은 모두 남의 기준일 뿐이야. 우리는 다른 사람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살아야만 해.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 좋은 글쓰기라는 것도 결국 좋은 삶과 비슷한 것 아닐까"

  "게다가 뻔뻔한 이야기잘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지 말고 쓰고 싶은 글을 썼으면 좋겠어. 네가 그랬잖아. 사유가 얕은 자들은 남의 철학에 기대어 살게 된다고. 결국 내면의 질서 회복을 위한 글쓰기라고"


  바람이 푸른 새벽, 호밀밭의 소녀와 진주 귀고리를 한 그대. 눈사람 속 흐르는 눈물의 무정한 꿈. 봄봄, 젊은 느티나무. 다정한 밤, 끝없이 타는 등불, 그대와 조용히 잠을 자는 나. 빛 속으로 먼 그대 낡은 문을 열어줘. 날 사랑한다고 해줘. 이거 전부 노래 가사. 나도 참, 이런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고 있는 건. 남의 입과 글과 생각을 빌려 자신의 것마냥 말하는 사람들. 어느 인터넷 페이지에서 흘겨본 몇 줄 글이 곧 자신의 생각이 되는 이들. 지금의 내가 그들과 다른 게 무엇인지. 그런 고로 습작생 폐관수련 들어갑니다. 저도 언젠가는 자기기만 없이, 혹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필요 없이, 쓰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앞으로 몇 개의 습작을 더 쓰게 될까요. 어딘가에는 제가 쓰고 싶은, 혹은 저만의 이야기가 있겠죠. 등단하면 돌아오겠습니다. 등단이라니. 이 무거운 단어를 쉽게 내뱉는 제 수준을 보아하니 앞으로 어찌 될지는 뻔하네요. 쓰읍. 못 돌아오겠네.


문학의 이해 - 코스모스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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