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야간비행
배낭을 메고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달이는 넓은 공항을 놀이터 마냥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놀았다. 짐을 챙기랴, 달이를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밤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다. 달이가 비행기에서 푹 자며 덜 힘들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모두 야간비행으로 준비했다. 다행히도 인도 왕복 직항을 아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달의 첫 장기 비행을 대비해 나름 비장하게 준비한 간식과, 작은 장난감들, 스티커 놀이 북, 플레이 도우, 등등을 잔뜩 챙겨 왔다. 그리고 정말 최후의 보루로 스마트 폰에 영상도 넣어왔다!
출국심사의 긴 줄을 아이와 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아찔한 일이었는데 혹시나 해서 문의한 결과 아이와 동반을 하면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서 긴 줄을 피할 수 있었다.
공항 곳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키즈존이 있었다. 그곳에서 신나게 아이들을 놀리고 나서 비행기를 타면 아이들이 곯아떨어져 쿨쿨 꿀잠에 든다! 는 아주 흡족한 시나리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즈존을 찾았고, 달이는 신발을 벗어던지며 신나게 놀았다. ‘좋았어! 이제 이렇게 놀다가 비행기에서 푹 자면 되겠어! 완벽해! 비행기 타면 한두 시간 안에 잠이 들겠군!’
탑승 시간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이제 정말 가는구나.
그래도 공항에 있으니 뭔가 떠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다.
몇 시간 후면, 나는 10년 만에 인도에 발을 딛고, 달과 남편은 처음으로 그 땅에 서게 될 것이다.
혼자 여행을 할 때, 나에게 인천공항은 항상 가슴 설레는 곳이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지구 정거장과 같은 곳.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되는 곳- 배낭, 그리고 여권, 큰 통유리 사이로 보이는 비행기들- 그 사이에 있으면 가슴은 떠나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쨍그랑- 꿈을 깨자.
그럴 낭만 따위는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아! 떠나는구나! 드디어 간다- 온몸으로 설렘과 감격을 느껴보던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비행기 이륙 시간은, 달이에게 주스를 마시게 할 준비를 하는 스탠바이 시간이었다. 주스를 빨대에 꽂은 채, 비행기가 이륙하는 타이밍을 살피느라 온 신경을 곤두 세웠다.
‘아 드디어 간다! 비행기가 떠오르네! 출발의 설렘? 낭만? 그게 뭐였죠’
"자 달아 이제 주스를 마시자! 지금이야” 비행기가 기울고 이륙을 하며 힘찬 비상을 할 때 내 눈은 작은 입으로 쪽쪽 주스를 먹는 달이의 입으로 향해 있었다. 아이가 기압 차이로 인해 귀에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이 비행기를 타고 7시간이 넘는 시간을 가야 한다. 달이도 의자에 앉아서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가 지금 엄청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기는 한데.. 달이에게 상황설명을 해주고 안심을 시켜주며, 놀잇 거리들을 하나 둘 꺼내 보였더니 예상대로 초롱 초롱한 눈으로 엄마가 펼치는 놀이들에 금세 집중을 했다. 사람들 좌석 등엔 불이 전부 꺼지고 이내 하나 둘 잠이 들었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건 달의 좌석 등-
달이만 홀로 작은 선반에서 스티커북에 열심이었다. 여기서부터 조금씩 예상에 빗나가기 시작했는데 비행기 안의 모든 사람이 잠을 이뤘는데도 달이는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분명 아까 키즈존에서 신나게 놀았고, 밥도 든든히 먹었고 평소라면 잠이 들 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계속 의자 위를 돌아다니거나, 화장실을 가자고 했다. 화장실을 세 번인가 다녀오고, 의자를 밟고 계속 일어나는 달이를 조용히 달래는 일은 생각보다 진땀 빼는 일이었다. 아. 달이가 낯설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지금 엄청 피곤할 텐데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곤한 비행 속에 달이를 둔 것에 대한 죄책감.
홀로 비행을 하는 상황이라면 의자에 기대어 영화 한 편을 본 뒤에 벽돌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었을 텐데
보고 싶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눈 앞에 두고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더 멘탈을 흔드는 것은 방관자, 마치 남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는 남편이었다. 달이를 조금도 돌보지 않고, 말을 붙여도 퉁명스럽기만 했다. 누가 보면 우리가 일행이 아닌 줄 알았을 것이다. 오로지 달이를 돌보는 것은 나의 몫, 이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 혼자만 아이를 신경 쓰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사람은 이때 나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던 상태였다고 한다.
예전에도 이랬었지 이 인간은... 갑자기 무의식에 있던 섭섭한 감정 발동이 일어나고 갑자기 남편이 원수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피곤해서 잠시라도 좀 가만히 쉬고 싶은데, 아 이 사람이랑 어떻게 여행을 하지? 빈정도 좀 상하는 것 같고 갑자기 분노의 감정까지 합세했다. 도착하자마자 비행기 표를 끊고 돌아오고 싶었다.
잠을 못 이루고 못 이루다가 겨우내 두시가 넘은 시간, 달이가 잠이 들었다. 달이가 간신히 잠이 들었어도 나는 잠이 오질 않았다 고단하고 이미 지쳤다. 너무 피곤하니 잠도 이루지 못한다. 좀 자 두어야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을 할 텐데. 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몸도 고단하고, 뭔가 마음도 굉장히 불편했다. 이렇게 절망적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기분이 언제까지 나에게 따라붙을까. 인도 여행 내내 인격 수양을 해야 하나 이미 여행은 글러 먹은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 보고 싶은데.. 볼 힘이 없다. 그래도 소리라도 들어 볼까..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영화를 재생한 뒤 잠이 들었다.
무관심하고 비 협조적인 남편. 그리고 엄마 바라기 호기심 많고 활달한 김달. 마음에 번뇌 한가득 엄마.
어쩌면 좋을까.
비행기에서부터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굳이 인도에 도착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짓이 이미 미친 짓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인도에 간다고 했을까.
이런 우리 가족을 태우고서,
아는지 모르는지 비행기는 인도 델리를 향해 잘만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