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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레 May 04. 2020

버터티의 추억

티베트 라싸, 버터티의 추억

우리에게 허락된 라다크의 시간은 정확히 10일


고산증에 적응하기 위한 이틀간의 휴식 끝에 3일째가 되어서야 숙소를 벗어났다. 드디어 레의 메인 바자르를 거닐어 볼 수 있었다. 상점들이 슬슬 문을 닫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다행히도 메인 바자르의 식당과 상점들은 거의 문을 열고 있었다. 거리에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여인들이 있었고 높은 언덕에 레 왕궁이 올려다 보였다. 달이가 좋아하는 우유와, 주스, 과일, 간식, 그리고 놀랍게도 한국 라면까지- 우리는 마트에서 오랜만에 식량을 잔뜩 보충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메인 바자르를 실제로 직접 걸어보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꿈꾸던 것이 현실이 되는 그 묘한 기분. 오랜만에 그 울림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정말로 여기에 왔구나. 두 발로 직접 거닐어보니 실감이 났다.


10월은 라다크의 비수기이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라다크의 추위를 무척 걱정했었는데 우리가 직접 겪은 10월 초 레의 날씨는 예상외로 그렇게 춥지 않았다. 해가 하늘 어디엔가 떠있는 동안에는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다닐만했다. 날씨가 이정도일줄 알았으면 라다크 일정을 조금 더 많이 늘렸을 것이다. 역시 직접 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메인 바자르를 둘러보다가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자연스레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달이를 위한 팬케이크를 주문하고, 준희와 나는 차를 마셨다. 내가 메뉴판에서 고른 것은 <버터티>였다. 버터티라는 글자를 보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런 당연히 버터티를 마셔야지! 나에게는 진한 버터티의 추억이 있다.




11년 전 유라시아 횡단을 하겠다고  배낭을 메고 홀로 여행을 떠났던 시절이 있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 천진에서 내린 후. 다시 베이징에서 이틀 동안 칭짱열차를 타고 향했던 티베트 라싸- 버터티는 나에게 있어 그 시절 티베트 라싸의 추억이다. 지금은 라싸에 가기에는 꽤 까다로운 조건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규제가 훨씬 덜 했던 때였다. 다행히도 티베트인스러운 내 외모는 티베트를 여행하기에는 플러스 요소가 되어, 비교적 안전하고 쉽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늘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라싸의 심장인 조캉 사원- 그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 그곳에서 버터티를 처음 만났다. 여행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지선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연거푸 마시던 버터티. 느끼한 듯하면서도 달콤하고 낯설지만 마실수록 진득했던 그 버터티와의 첫 만남-


해도 뜨지 않는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버스를 타고 찾아간 간덴사원에 도착했을 땐 아직 깜깜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뼈가 시리게 몹시 춥고 추웠다. 사원에 들어가려면 그 추위를 견디며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추위를 못 참은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건물에 무작정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 아저씨가 있었고 따뜻하게 불을 피우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사무치게 춥고 추워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불로 향했고 본능적으로 불을 쬐었다. 그곳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곳 같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간신히 받은 다음 안에서 머물지 못하고 다 나가서 라면을 먹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아저씨는 너무 추워서 불을 쬐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시고도 내쫓지 않으셨다. 푸근한 미소로 내 앞에 작은 잔을 하나 주시고는 말없이 버터티를 따라주셨다. 아저씨는 내가 이방인인걸 눈치채신 것일까?


날이 서서히 밝아 오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저씨는 내 잔에 버터티가 줄어들 때마다 말없이 오셔서 계속 버터티를 채워주셨다. 돈도 받지 않으셨다. 이따금 버스 기사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옆에서 불을 쬐다가 차를 마시다가 나가고는 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저 앉아서 계속 불을 쬐며 차를 마셨다. 사원을 보러 새벽같이 일어나 그곳에 갔지만 결국 그날 간덴사원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질 않았다. 사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 그 건물 안에서 계속 버터티를 마시고 따뜻한 불을 쬐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오후가 되어서 다시 라싸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주인아저씨가 아무런 대가 없이 계속 따라주시던 버터티. 내겐 그 시간들이 그날 쬐던 불처럼 굉장히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하얗고 진한 버터티를 10년이 지나 이곳에서 뜻밖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레는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라다크의 색채가 뚜렷했다. 인도의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이곳이 인도 영토라기엔 전혀 인도스럽지가 않았다. 라다크는 티베트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티베트의 불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고, 생활 모습도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있어 티베트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만일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날 나라를 고를 수 있다면, 진지하게 라다크에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티베트에서의 향수를 느끼며 버터티를 마셔본다. 너무 반가운 오랜만의 맛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으로만 접하던 신비의 장소 라다크 <다시 태어나도 우리> 다큐멘터리를 보고, 마음속에 쿵하고 울린 울림- 이곳에 그리도 오고 싶어서 남편과 아이까지 같이 데리고서 오고야 만 라다크.


지금 이곳에 있는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주옥보다 더 값지기만 하다.


레(leh) - 메인 바자르
레(leh)  메인 바자르
2018 버터 티


2007 간덴사원
2007 버터 티
2007 버터티의 추억
말없이 버터티를 주시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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