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사진첩
엄마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볼만한 것이 없는지 찾고 있었다. 그날따라 TV 옆에 놓인 높은 찬장이 눈에 거슬렸다. 정확하게는 찬장 속 책들이 들쑥날쑥 꽂혀 있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찬장 앞으로 가 활짝 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댈까 훑어보는데 낡은 사진첩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번도 더 보았던 우리 가족의 추억상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나는 또 추억상자를 펼쳤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다락방 같은 사진관 하나가 있었다. 아가들의 백일사진부터 어르신들의 영정사진까지 모두 여기서 찍었다. 사진관 외부에 걸려있는 많은 사진 중에 내 사진도 있었다. 장마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투명 우산을 쓰고 풍선을 힘차게 불고 있는 나를 사진관 삼촌이 찍었다고 한다. 왜 그때 밖에서 풍선을 불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아스럽지만 그 모습을 남겨주신 삼촌 덕분에 사진첩에 당당히 한자리를 꿰차고 있다.
또 한편에는 마당 잔디밭에 놓인 커다란 고무 대야 속에 발가벗은 어린 나와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씻겨주는 고모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에 유행하던 미스코리아 스타일의 파마머리를 한 고모와 해맑게 웃으며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사진 속의 나는 참 행복해 보인다.
아빠와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도 꽤나 많다. 하얀색 반팔 PK셔츠에 하얀색 마바지, 그리고 흰색 구두를 신은 아빠의 모습. 얼큰하게 한잔한 뒤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흥이 난 모습이 찍힌 사진은 내게 가장 익숙한 아빠의 모습이다. 엄마와 머리를 맞대며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에도 아빠는 하얀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있다. 젊었을 때도, 나이가 들어서도 아빠의 옷차림은 늘 깔끔한 하얀색이었다.
내가 태어난 무더운 7월,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 아빠의 품에 안겨 찍은 우리의 가족사진. 뜨거운 햇빛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도 한데 아빠와 엄마는 찡그리는 모습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 끝에는 늦둥이로 태어나 한없이 사랑스러운 딸을 향한 엄마,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참 동안 추억에 잠겨 바라보던 사진첩에는 어느 순간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았다. 우리를 담아내던 아빠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춘 2001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