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기억

by 이방글

나의 장점이자 작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사람을 잘 기억한다는 것.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목소리, 말투 그리고 얼굴을 잘 기억한다는 점이다.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스치듯 인사만 해도 내 머릿속 데이터에 입력되는 느낌이 든다. 큰 특징이 없는 무난한 사람일 경우에는 긴가민가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과거에 입력되었던(나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데이터들로 인해 불현듯 떠오를 때가 많다. 가끔 상대방이 흠칫하는 게 느껴질 때도 있다.


첫 기억은 수능이 끝난 후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 기억을 잘 한다는 걸 몰랐을 때였다. 백화점 내 영화관 앞에 있던 샌드위치 집에서 첫 알바를 했을 때, 나는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샌드위치를 사러 왔던 적이 있던 사람이 길가에서 마주치거나, 백화점 안에서 볼 경우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친숙함.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이 익숙하지?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랑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해봤다는 사실이다.


샌드위치점 매장이 계약이 종료되어 사라지게 되고 운이 좋게도 나는 건너편 아일랜드형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점에서 일할 때 아르바이트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는 단골 고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부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하고, 한 가지 제품만 드시는 고객에게 먼저 오늘도 이걸로 드릴까요 하고 묻기도 했었다. '나를 알고 있잖아?'라는 눈빛을 띠며 환해지는 얼굴, 그러곤 웃으며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까지 전하는 고객들. 사람 기억을 잘 하는 점이 이럴 땐 플러스 효과를 가져왔다.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곤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를 드시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스크림 매장 사장님께서 건너편 샌드위치점에서 일하는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고 했다. 유독 내가 일할 때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과 어린 나이임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드셨다고.(이런 이유로 샌드위치 매장이 없어졌을 때 내게 먼저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일해보자고 스카우트(?) 제의를 하셨었다고 한다.)


내가 했던 업무의 특성상 수많은 업체들에게서 제품 제안을 받고, 제품 제안을 하기 위해 한 번 또는 여러 번에 걸쳐 다수의 담당자들이 사무실로 오고 갔었다. 그 해 사업 계획과 맞는 제품이 있으면 다방면으로 제품 검토를 하며 협력사가 되기도 했고, 그 한 번의 미팅으로는 인연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 해의 가장 큰 행사인 카페쇼가 킨텍스에서 열릴 때였다. 회사명을 달고 새로운 아이템, 우리 브랜드와 협업할 수 있는 좋은 협력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매년 찾았던 카페쇼. 거기서도 나의 사람 기억력이 빛을 발했다. 몇 해전 제품 미팅을 했었던 업체 부스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함께 하지 못해 협력사가 되진 못했지만 제품은 좋았던 기억이 있어 방문했었다. 거기서 그 당시 미팅했던 담당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내가 눈여겨보았던 제품을 그 당시 최대 경쟁사였던 커피 업체 담당자에게 제품 제안을 하고 있었고, 콧대 높은 경쟁사 담당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럼 샘플 하나 주면 한 번 검토해 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먼저 오랜만에 얼굴 본다며 인사를 건넸다. 업체 담당자의 얼굴에는 반가우면서 물음표가 섞인 듯한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아줬다. 명함을 주며 우리 이 제품으로 미팅한 적 있지 않냐며 말했더니 명함 속 이름과 얼굴을 한 번 살핀 뒤 화색이 짙은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 걸 기억하시냐며.(이 계기로 인해 결국 우리와 좋은 제품으로 함께 하였다.)


한 번의 만남으로 기억된 사람은 잘 잊히지 않는다. 크나큰 장점이자 작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기에.


오늘도 가오픈 기간 동안 에이드를 종류별로 먹고 간 커플이 아주 오랜만에 왔다. 대화가 오고 가거나 아는 체하지 않았었다.(요즘은 아는 체하면 부담을 느낀다고 하기에 자제 중이다.) 좋아하던 음료가 떠오르고, 지금은 제철이 아니어서 재료가 없다고 말하려고 머릿속에서 대사까지 준비 중이었다. 좋아했던 두 가지 음료 중 한 가지를 주문했고 속으로 '여전히 좋아하시네'라고 생각했다. 내 공간을 열면서 사람 기억력은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 취향에 맞춰 제품을 추천하기에도 편하고 상황에 따라 응대할 때에도 믿음을 줄 수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나만의 능력이다.

작가의 이전글꿈 꾸던 공간, 내 취향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