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조차도 내게 가르침을 준다.
"저수지에 갇힌 물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물은 안쪽 둑을 밀어내면서 탈출할 기회만을 노린다.
반드시 그 기회의 날은 오기 마련이다. 또 그 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중력을 가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하게 잠든 거 같지만 사실을 출렁거리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틈만 생기면 물은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비껴가고 그래도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물은 또 다른 탈출구를 열어 줄 틈이 생길 때까지 겉보기에는 졸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머물러 있을 것이다.
물이란 어떤 기회도 놓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
글의 힘은 저렇게 위대하다.
어디서 읽은 구절인지 모를 저 글귀들을 보면서 여러 번 다짐했다. 나도 한번 저렇게 살아야지! 하며 다짐했었고 실제로 힘들 때마다 저 글귀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 힘들었던 시간들 중에서도 나름 남보다 좀 더 버틸 재량과 용기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는 너무나 막연하고 막막했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믿는 마음의 바탕엔 저 글이 있었다. 젊었을 때 고통이 고통인지 알듯 모를 듯 혼란스럽던 시절, 그때 나의 무덤덤한 성격이 가장 반가웠던 건 여우스럽지 않은 그런 성향의 때론 곰 같고 돼지같이 미련해도 그저 그 시간만 지나가면 좋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던 어리석지 않은 건강한 미련함 때문이었다.
물론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고 늘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만 빼고 잘 돌아가던 시절조차 나만 불행한 듯 느껴져서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어도 그 조차 내색하면 유치하고 이상할 거 같았지만 그저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던 그 시절을 가끔 지금도 떠올린다.
먹고 싶은 게 있지만 지갑이 비어있다면...
이제는 지갑에 언제든 큰돈은 아니어도 사고 싶은 물건들을 큰 고민 없이 바로 지갑을 열어 살 수 있을 만큼 인생이어서 감사한 일이고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언제든 장을 봐 와서 바로바로 해 먹을 수 있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고 무엇보다 자잘한 신경을 쓰지 않고 구매의욕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 청춘의 정점에서의 느꼈던 가난은 사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저 그땐 정말 비가 내리면 우산 없이 맞을 수 도 있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때 우연히 글 쓰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고 받은 선금으로 받은 돈으로 혼자 동네 회센터 같은 곳에 가서 가장 작은 광어를 만 원어치 회로 떠 달라고 해서 혼자 집에 와서 몰래 먹었을 때 느꼈던 생선살의 맛은 특급호텔에서 먹은 가장 최고의 만찬이었던 걸로 기억되는 걸 보면 배고픔이나 결핍이 주는 에너지가 그저 나쁜 것만으로 기억이 되는 건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힘들 때 주변에 지인들이 챙겨준 그 순간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가슴속에 감사함으로 기억되는 것 또한 인생의 한 페이지이자 소중한 순간이기도 하며 그 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내겐 무형의 자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꽃을 잘 키우는 동생이 풍요로움 속에서 피는 꽃보다 결핍의 에너지를 받고 피는 꽃을 보면 그 꽃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인생도 그런 거 같다고 결핍이 그저 억울하고 나쁜 감정으로 기억되기보다 이겨내면 자랑스러운 그런 감정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술자료관 도서실에서 햇살을 등 뒤로 하고 읽고 보았던 수많은 무용책들과 사진들.
서초동 아르코 예술자료원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젊은 시절 그곳에 점심을 건너뛰며 읽었던 무용 책들이 언제나 내 청춘의 가장 빛나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그땐 미래를 알지 못했어도 그저 그 순간으로만 생각해 보면 그때의 선택과 집중력은 지금도 다른 그 어느 기억보다 생생히 기억난다. 책을 읽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용책을 혼자서 다독으로 갑자기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짧은 시간 그렇게 읽은 글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새롭게 생각해서 글을 만들어내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장 지루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텐데.. 이제 와서 내가 후회하지 않는 선택과 장소와 시간으로 그곳을 그렇게 기억한다는 건 축복에 가깝기도 한 것 같다.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하고 수 없이 후회하고 매번 자책했다면 이렇게 아름답고 감사하게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읽었던 책 들 덕분에 배운 여러 가지 자양분이 지금의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나를 우연히라도 다시 조우한다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줬을 텐데... 그땐 그걸 알지 못했다.
물론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 내고 싶은 모두의 바람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렇게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어 냈기 때문에 지금의 이런 평온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도 있게 되었을 것이다.
용기란 것도 결국 어찌 보면 포기하지 않고 한번 더 하는 마음일 것이고 소질이라는 것 또한 그 어떤 일이든 잘하고픈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고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길을 걷고자 마음먹었던 그 순간이었음을 이 아침에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