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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Jan 06. 2017

한동인과 정지수

월북과 납북 사이에서..

납북 후 한동인의 행적 


  한동인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자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북행을 두고 두 가지의 설이 있으니 그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5일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예정된 공연을 하던 중에  극장에 나와 공연을 단원들과 함께 준비하던 중에 이 사실을 알고 사직동 집으로 돌아가서 늙으신 부모님들 때문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집에 딸린 연습실 아래채 벽장에서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발레단 단원이었던 박고성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는 원로 무용학자 증언 조원경의 증언 하나와 전날 공연을 무사히 마친 후 서울발레단 단원들은 오전부터 극장에 나와 공연 준비를 하던 중에 점심 무렵 북한에 남침에 의해 서울이 장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산하게 되었고 이어 단원들은 각기 자신들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한동인 역시 사직동 집으로 갔다는 알리바이는 여기까지는 정확하게 맞는 편이다. 그런데 이후 한동인은 남쪽으로 피난 가라는 가족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부모님들만 남기고 피난 갈 수 없다고 우겨 그대로 집에 눌러 있었는데 그때 이미 서울은 완전히 인민군 소굴로 변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같은 동네 사는 자유 청년단  한 청년의 밀고에 의해 한동인은 부모님과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 후로 여동생인 한계초를 두 번 정도 만난 후, 그 해 8월 이후에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어 그것이 그들 가족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고 한다.  

  한동인의 북행은 이미 예고되었다는 것은 일본 유학시절 알고 지낸 동료 정지수가 월북 후 한동인에게 월북을 강요하고 평양에 오라는 편지가 서너 차례 집으로 왔다는 가족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무용가들의 북행은 두 갈래로 이어지는 편이었는데 먼저 앞서 월북한 정지수, 이석예 부부처럼 자의에 의해 북행한 경우고 하나고 두 번째로는 6.25 전쟁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납북이 그 후자에 해당한다고 봤을 때 한동인의 경우는 후자라고 보인다. 

 월북 후의 한동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후 한동인은 월북 후 2급 예술가로서 인민군 협주단 부단장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단장으로 승진도 하고 한국에서는 해방 직후 왕성한 활동으로 미뤄 온 결혼을 북행 후 예술 급수 2급의 무용가 나숙희와 결혼을 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즈음은 북한 무용계를 살펴보면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첫째는 최승희를 주축으로 한 무용연구소이고, 두 번째는 정지수와 이석예 부부를 중심으로 한 국립 예술극장 무용단이 있었고, 세 번째로는 한동인과 나숙희가 이끄는 인민군 협주단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동인도 북한 예술계의 핵심적인 자리에 앉아있었으나 그는 예술가 개인의 독창성과 창조적 상상력이 무시된 채 오로지 인민대중의 감정과 정서에 복무하는 주체 예술이 강요된 북한의 무용 이념에 동화되기란 쉽지 않아서 사회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창작방법론을 모색하도록 강요당하자 남한에서의 활발한 활동과 달리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다.  

 더불어 1970년대 초반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인민과 민족적 특성 그리고 통속성, 현대성을  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하는 이른바 피바다식 혁명 무용극의 주체 무용극이 강요되자 원래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자적인 성향을 강했던 남한 출신의 무용가들은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한동인도 예외는 아니게 되었다. 북한 예술계에서 정치적 노선이 변경된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착출’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1963년 한동인은 초급당위원장에게 비판을 받은 후 점점 그 활동이 뜸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인민군 협주단에서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인민배우니 공훈배우니 하는 칭호가 부여되는데 반해, 10여 년째 예술 급수 2급에 머무르는 자신의 신세를 가까운 이에게 한탄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 화근이 되어 북한 당국의 의도대로 그는 착출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북한 예술에 있어서 발레는 그다지 환영할만한 장르는 아니라고 본다. 더 근원적으로 파고들어 봐도 북한 사회가 추구하는 사회적인 이념과 리얼리즘은 애당초 화합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러면으로 봤을 때의 한동인이 북행이 갖는 의미는 애당초 화합이 불가능하고 그의 정서나 기질상 적합하지 않기에 그를 두고 일컬어지는 부제로 한국 발레의 개척자, 비극적 역사의 희생양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예술사적으로 암울하고 억울한 삶을 대변해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동인을 지켜보았던 무용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임성남은 한동인에 대해 여성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온화한 인품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고 하였고 고전발레의 재현한 것도 의미 있지만 탁월한 안무력으로 창작발레를 만들었다는데 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원로 무용평론가들 역시 그에 대한 앞선 의식과 선구자적 역할에 대한 평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단지 월북인지 납북 인지도 모른 채 북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용사에서 묻힌 한동인의 업적은 그 당시의 활동으로만 사라지기보다는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지수의 등장


  한동인과 동시대에 발레를 전공한 인물로는 정지수를 꼽을 수 있다. 한동인과 같은 시기에 일본 무용가 마스다에게 발레를 사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신진 무용가들이 무용을 배우고 데뷔하는 경로의 대부분은 일본에서의 유학 후,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시기적으로 서양 예술의 본고장인 본국으로 가서 배우기 어려운 점을 감안,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으로 가서 배우는 무용가들의 행로는 거의 모범 답안지처럼 보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정지수도 이 노선대로 무용가로서의 입신과 성장을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로 일본에서 무용을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지수에 관한 자료는 한동인보다 훨씬 더 적고 그의 월북으로 인해 그에 관한 자료는 더더욱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왜 일제 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발레를 배우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다.   

   8.15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의 정지수가 활동한 이력 중에 하나는 일극(日劇, Dancing Team)인 니찌게끼 댄싱팀에서 일본 이름인 사다이 노부르의 이름으로 활약했던 무용수로 큰 키와 화려한 외모로 인해 주로 고전발레 레퍼토리에 기용되어 활약했던 무용가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 후 귀국해서는 조선악극단의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부인과 함께 월북해 국립 무용예술극장 무용단의 예술 급수 1급으로 활동하는 등의 활동이 바로 그것인데 그런 발레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외적인 행보로 주목받은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은 한동인과 비교했을 때 다른 양상을 보인 게 사실이다. 

 한 가지 정확한 사실은 일본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맹활약하던 그가 1942년을 기점으로 귀국하게 되었던 이유는 귀국 후 그에게 조선악극단의 상임안무자라는 직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반 대중을 열광케 한 조선악극단의 공연활동 내용이나 공연 프로그램에 있어 무용과는 불가분의 관계이었다고 하는데 먼저 앞서서 이 악극단에 관계된 무용가로는 김민자를 들 수 있다. 

 한때 조택원의 상대역으로 유명했던 김민자는 석정막 문하에 있다가 먼저 귀국해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해 국내 예술계의 흐름을 앞서 적응하고 있던 김민자가 일본에서 안면이 있던 정지수를 조선악극단의 사장인 이 철에게 소개해줌으로써 둘 사이를 연결시켜 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악극단의 사장이었던 이 철은 1938년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의 설립 때 지원을 아끼지 않은 현 철의 외삼촌이었고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한 무용가로는 정지수 외에도 주리를 비롯 최선희, 김자영, 임경희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김민자를 통해 제안된 상임안무자라는 노른자위 같은 자리를 정지수가 마다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조선악극단의 연습실은 서울 삼일로 건너편 광교 다리 지하에 있었고 정지수가 안무자로 있을 때 한동인이 이 연습실을 자주 이용했고 그 후에도 정지수는 1여 년쯤 후에 돈암동에 무용연구소를 마련, 귀국 후 딱히 바로 연습실을 만들 수 없게 되자 한동인이 이 연습실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고 정지수의 제자인 이인범이 증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동인이 직접적으로 조선악극단과 연관되어 활동한 이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같은 춤을 전공하였지만 아마도 그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은 서로 다르게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들의 친분은 아마도 같은 시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시대적 정황상 남자로서 쉽게 전공하기 힘든 장르를 전공하였다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 공조적인 관계로 늘 상호 협조하던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협조적인 공조체제의 결정체는  한동인이 만든 서울발레단 창단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고 지대한 역할을 그의 협조자인 정지수가 돋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그 하모니도 해방에 이르러서는 다르게 반응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한동인의 경우처럼 해방 후 무용계의 주된 흐름인 단체와 조직체의 활동을 의미하는 데 있어 한동인이 활발하게 활동해 한국 무용계의 중진으로 도약해 국내 최초의 발레단인 서울발레단을 결성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던데 반해 정지수의 경우는 특별한 활동 이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월북전 주목받은 공연으로는 한동인과 더불어 조택원의 제자인 진수방과 함께 1946년 3월 23일~24일 이틀간 국제극장에서 신춘 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이 공연은 8.15 광복 직후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행해졌던 발레 공연으로 주목받은 게 전부이다.



정지수의 결혼 


 북행 전의 그의 마지막 행보 중의 하나는 그의 결혼인데 그의 부인은 한국무용을 전공하던 무용가 이석예로 원래는 조택원 무용 연구소에서 한국춤을 전공하던 여성이었는데 이석예는 정지수를 만난 이후 전공을 발레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지수가 이석예를 만나 처음 교제를 시작할 무렵이 1947년이었는데 이때 이석예는 그해  6월 조택원의 미국행 도미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한창 연습이 진행 중이었고 이때 조택원은 정지수와 사귀는 이석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이석예는 도미 공연자 명단에서 제외되자 이런저런 이유들이 모여 결과적으론 정지수와 이석예는 사상적 추이로 월북하여 북에서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이외의 상황들이 그들의 월북 결정에는 나름대로 여러 복잡한 사정들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정지수는 예술 환경의 열악함과 경제적인 궁핍함과 자신의 미래의 아내인 이석예로 인한 조택원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 등이 맞물리자 서둘러 북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추측된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 1947년에 월북한 정지수, 이석예 부부는 북행 후 결혼을 하였고 북한의 국립 무용예술 극장 무용단 소속으로 활동할 정도로 북한 당국의 신임이 두터웠고 이들 부부는 예술 급수 1급으로 월북 무용 가중 가장 많은 지원도 받고 신임을 얻어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말로 역시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의 비판을 받고 축출되었으니 그 이유인 즉, 일찍이 대지주의 아들로 일본 유학을 했다는 점과 부르주아 근성과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 북한 당국이 내세운 이유였다. 그러나 대지주의 아들이라 하여 출신 성분을 문제 삼은 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로 정지수는 그리 풍족한 집안의 출신은 아닌 것으로 전해지며 결국 정지수는 1961년 아동 궁전 안에 있는 아동 예술극장의 안무자로 좌천되어 북한 무용계의 핵심에서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정지수의 제자인 이인범은 스승을 회고함에 있어 그의 춤은 남성다운 에너지를 주조로 한 박력 있는 테크닉이 돋보이며 발레 동작중에 하나인 그랑 주떼를 할 때면 무대 상수에서 하수에 다다를 정도로 우수한 테크닉의 소유자라 하였고 한 원로 무용학자의 증언으로는 정지수는 체격이 좋고 외모 또한 출중하여 그 인물됨이 가히 발레리노 스타일 그 자체이었다고 하였다. 그에 반해 한동인은 키가 작고 외모 또한 왕자과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센스 있는 무용가였다고 전하였다. 

 이렇듯 시기적으로 적절하게 만난 그 두 남성 무용가의 등장은 한국 발레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그 이면에 시대적으로 불운한 역사의 시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좌익과 우익이라는 갈등과 대립, 혼돈한 상황에서 피워야 했던 예술의 꽃은 결국 북행이라는 비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은 제대로 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체 비극적 역사 현실에 묻혀 사장되는 예술가로서의 불운을 감수해야만 하는 그들 개개인의 불운이라고 이기도 하지만 사장된 그 역사를 돌이켜 봐야 하는 우리들의 불운이기도 하다. 

 그것은 서양 예술인 ‘발레’가 이나라 이 땅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그들은 전쟁과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제 그 씨앗을 자라게 하는 몫의 일은 이제 후대의 남겨진 사람들의 몫은 분명한 사실이다. 분명 그들은 우리 무용사에도 또한 한국 발레사에도 길이 남을 업적을 큰 발자취로 남긴 체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로 인해 생긴 한국 발레의 터전은 이제 한국 발레사라는 커다란 빛을 안은 체 서서히 그 여명이 밝아오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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