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인(韓東仁) : 1922~ ?
출생
한동인은 1922년 강원도 고성면 동리에서 관직에 몸담았던 아버지 한기태 (韓基太) 어머니 김인해 여사의 3남 3녀중 차남인 넷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한동현(韓東玄)이었지만 그가 왜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으나 문헌상의 근거로 봤을때는 일본유학 후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 활동을 할려면 예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친구의 권유로 동인(東仁)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종로 5가 235-2번지 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공직에 있는 관계로 강원도 고성군 동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고성군청 서무과장 으로 재직중이었다.
한동인의 조상은 대대로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한기태 (韓基太)는 관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인해 여사는 지극히 평범한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어머니 스타일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한가지 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의 부모들은 남달리 신교육의 필요성을 일찍이 절감한 사람들이어서 아들은 물론이고 딸들도 제대로 교육 시키고 교육 받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교육관을 지닌 부모들이 있었기에 한동인의 교육적 환경을 배려한 부모님들의 판단으로 인해 한동인이 중학교 입학할 즈음에 그의 부친은 강원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 서울로 이주할 결심을 하고 서울로 이주하기전까지 아들이었던 그는 고성에 있는 회양초등학교에서 유년시절은 보냈다고 하는데 어린시절의 한동인의 모습은 학업성적도 뛰어나고 모범생에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였다고 알려졌다. 특히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미술이나 공작에 대한 감각과 소질이 뛰어나 친구들에게 인정받았고 무엇이든 한번 제대로 만들면 실제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정도로 만들어내서 그 당시의 한동인의 별명은 ‘장이’ 로 불리워지기도 했다고 하며 또한 무슨일이든 한번 빠지면 그 일에 몰두한 나머지 시간가는줄을 몰라서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는 일 또한 비일비재 했다는걸봐도 어릴적부터 평범한 소년의 모습 이면에 예술가로서의 남다른 기질이 이미 그에게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던 그에게 서울생활은 처음엔 적응하기 쉽지 않았으나 차츰 나아져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상을 되찾아 갔다고 한다. 그 무렵 그의 부친의 소망은 자신의 장남은 대를 이어 관직을 선택했길 바랬고 차남인 한동인의 평소 꼼꼼하고 섬세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넓은 아량을 지닌 것을 파악해 그가 미래지향적이고 전문직인 의사가 되기를 소망하여 그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또한 육형제나 되는 자식들 중에서도 차남인 한동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으며 희망이 현실로 되기 위한 노력으로 강원도 오지에서 서울로 까지 이주할 정도로 자식농사에 열심이었던 여느 부모들과 다를바 없이 노력한것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자아를 찾고 있던 한동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평소대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었지만 이미 한동인은 그때부터 남다른 자아를 형성해가고 있었던것같다. 그 징조는 이미 배재중학교 졸업반 무렵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유복했던 그당시 그의 집에는 전축이 있었고 그러던 차에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 점점 심해져 혼자서 전축을 들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배화중학교를 졸업할 18세 무렵에 한동인은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가 어떤 계기로 발레를 동경하게 되었고 일본유학까지 갈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질풍노도 시절의 한동인
2003년 5월에 발간된 춤지의 한동인론(韓東人論)에 발표된 내용을 발췌해 보면 그가 일본행을 결정하기전의 이력중에 한국전통춤에 대가인 한성준에게 무용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증언중에 하나로는 자기방에서 긴수건을 들고 혼자서 이리저리 뿌려대며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는 가족의 증언이 있었고 원로무용가 조광의 증언으로는 그가 발레공연 중간중간에 승무와 학춤을 직접 추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바로 그것이다.
승무에 경우는 지금과 같이 염불장단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전체 적으로 소요되는 5~6분 동안 법고가락까지 추었다는것이다. 학의 모습을 형상화해 학춤 역시 부리로 무대바닥을 쪼는 모습이나 학의 날개짓을 본뜬 날개사위 등은 영락없이 한성준의 춤사위 그대로 이었다는것이다. 발레공연에 왠 승무와 학춤이냐고 의아하게 생각 하겠지만 춤맵시나 실력으로 봐서는 전통춤을 추는 이들에게 견주었을때 그다지 뒤지지 않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한성준의 조카딸이자 한국무용의 명인인 한영숙 역시 1930년대말 운영하는 조선음악무용연구소(朝鮮音樂舞踊硏究所)에서 한동인이 1년동안 춤을 배웠다는 말을 들을적이 있다고 회고 했다는걸 보면 한동인이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문헌상의 자료가 하나도 없이 단지 원로무용가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그 이력을 찾는다는 것 역시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이유로 무용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발레를 전공하려는 그가 왜 전통춤에 대가인 한성준에게 한국무용을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때 그가 한성준의 문하에 들어가 그 춤을 경유한것만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를 두고 무용평론가 성기숙의 추정으로는 한동인의 17세 즈음인 1938년경에 한성준에게 입문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하였으며 일제초기 국악인들과 전국을 유랑하며 명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 한성준은 1930년대 서울에 정착, 전통춤을 집대성하여 무대양식화를 꾀하는 한편 조선음악무용연구소(朝鮮音樂舞踊硏究所)를 설립, 전통춤의 체계적인 전습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으려는 전형적인 시기로 볼 수 있는것이다.
한성준이 전국을 유랑하며 체득한 각종 민속춤과 권번의 기생들에게 매개되었던 정재를 혼용하여 무려 100여종에 달하는 전통춤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안무하게 되었고 한성준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 작업에 의의는 일단 ‘저급한 짓거리’로 인식되오던 전통춤의 인식을 한단계 격상시켜 놓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전통춤 역시 당당한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193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 한성준에게 입문하여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그 춤을 습득하게되고 체험하게 된 것은 길지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사료되는것이다.
일본유학을 선택한 한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