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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Dec 28. 2016

한국발레의 개척자 한동인

한동인(韓東仁) : 1922~ ?

출생


  한동인은 1922년 강원도 고성면 동리에서 관직에 몸담았던 아버지 한기태 (韓基太) 어머니 김인해 여사의 3남 3녀중 차남인 넷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한동현(韓東玄)이었지만 그가 왜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으나 문헌상의 근거로 봤을때는 일본유학 후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 활동을 할려면 예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친구의 권유로 동인(東仁)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종로 5가 235-2번지 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공직에 있는 관계로  강원도 고성군 동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고성군청 서무과장 으로 재직중이었다.

   한동인의 조상은 대대로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한기태 (韓基太)는 관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인해 여사는 지극히 평범한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어머니 스타일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한가지 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의 부모들은 남달리 신교육의 필요성을 일찍이 절감한 사람들이어서 아들은 물론이고 딸들도 제대로 교육 시키고 교육 받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교육관을 지닌 부모들이 있었기에 한동인의 교육적 환경을 배려한 부모님들의 판단으로 인해 한동인이 중학교 입학할 즈음에 그의 부친은 강원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 서울로 이주할 결심을 하고 서울로 이주하기전까지 아들이었던 그는 고성에 있는 회양초등학교에서 유년시절은 보냈다고 하는데 어린시절의 한동인의 모습은 학업성적도 뛰어나고 모범생에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였다고 알려졌다. 특히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미술이나 공작에 대한 감각과 소질이 뛰어나 친구들에게 인정받았고 무엇이든 한번 제대로 만들면 실제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정도로 만들어내서 그 당시의 한동인의 별명은 ‘장이’ 로 불리워지기도 했다고 하며 또한 무슨일이든 한번 빠지면 그 일에 몰두한 나머지 시간가는줄을 몰라서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는 일 또한 비일비재 했다는걸봐도 어릴적부터 평범한 소년의 모습 이면에 예술가로서의 남다른 기질이 이미 그에게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던 그에게 서울생활은 처음엔 적응하기 쉽지 않았으나 차츰 나아져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상을 되찾아 갔다고 한다. 그 무렵 그의 부친의 소망은 자신의 장남은 대를 이어 관직을 선택했길 바랬고 차남인 한동인의 평소 꼼꼼하고 섬세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넓은 아량을 지닌 것을 파악해 그가 미래지향적이고 전문직인 의사가 되기를 소망하여 그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또한 육형제나 되는 자식들 중에서도 차남인 한동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으며 희망이 현실로 되기 위한 노력으로 강원도 오지에서 서울로 까지 이주할 정도로 자식농사에 열심이었던 여느 부모들과 다를바 없이 노력한것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자아를 찾고 있던 한동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평소대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었지만 이미 한동인은 그때부터 남다른 자아를 형성해가고 있었던것같다. 그 징조는 이미 배재중학교 졸업반 무렵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유복했던 그당시 그의 집에는 전축이 있었고 그러던 차에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 점점 심해져 혼자서 전축을 들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배화중학교를 졸업할 18세 무렵에 한동인은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가 어떤 계기로 발레를 동경하게 되었고 일본유학까지 갈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질풍노도 시절의 한동인


2003년 5월에 발간된 춤지의 한동인론(韓東人論)에 발표된 내용을 발췌해 보면 그가 일본행을 결정하기전의 이력중에 한국전통춤에 대가인 한성준에게 무용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증언중에 하나로는 자기방에서 긴수건을 들고 혼자서 이리저리 뿌려대며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는 가족의 증언이 있었고 원로무용가 조광의 증언으로는 그가 발레공연 중간중간에 승무와 학춤을 직접 추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바로 그것이다.

   승무에 경우는 지금과 같이 염불장단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전체 적으로 소요되는 5~6분 동안 법고가락까지 추었다는것이다. 학의 모습을 형상화해 학춤 역시 부리로 무대바닥을 쪼는 모습이나 학의 날개짓을 본뜬 날개사위 등은 영락없이 한성준의 춤사위 그대로 이었다는것이다. 발레공연에 왠 승무와 학춤이냐고 의아하게 생각 하겠지만 춤맵시나 실력으로 봐서는 전통춤을 추는 이들에게 견주었을때 그다지 뒤지지 않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한성준의 조카딸이자 한국무용의 명인인 한영숙 역시 1930년대말 운영하는 조선음악무용연구소(朝鮮音樂舞踊硏究所)에서 한동인이 1년동안 춤을 배웠다는 말을 들을적이 있다고 회고 했다는걸 보면 한동인이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문헌상의 자료가 하나도 없이 단지 원로무용가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그 이력을 찾는다는 것 역시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이유로 무용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발레를 전공하려는 그가 왜 전통춤에 대가인 한성준에게 한국무용을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때 그가 한성준의 문하에 들어가 그 춤을 경유한것만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를 두고 무용평론가 성기숙의 추정으로는 한동인의 17세 즈음인 1938년경에 한성준에게 입문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하였으며 일제초기 국악인들과 전국을 유랑하며 명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 한성준은 1930년대 서울에 정착, 전통춤을 집대성하여 무대양식화를 꾀하는 한편 조선음악무용연구소(朝鮮音樂舞踊硏究所)를 설립, 전통춤의 체계적인 전습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으려는 전형적인 시기로 볼 수 있는것이다.

   한성준이 전국을 유랑하며 체득한 각종 민속춤과 권번의 기생들에게 매개되었던 정재를 혼용하여 무려 100여종에 달하는 전통춤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안무하게 되었고 한성준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 작업에 의의는 일단 ‘저급한 짓거리’로 인식되오던 전통춤의 인식을 한단계 격상시켜 놓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전통춤 역시 당당한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193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 한성준에게 입문하여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그 춤을 습득하게되고 체험하게 된 것은 길지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사료되는것이다.


일본유학을 선택한 한동인


   1939년 한동인의 나이 18세 때에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일본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의 소망을 외면한체 그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그의 부친은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 수 도 있었던 그가 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체를 매개로 한 춤의 세계에 빠져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분의 역사를 빼고 나머지 결과론적인 역사를 두고 그를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일본행을 결심하기까지의 그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말기로 접어든 1940년대의 한국무용계는 한성준과 권번의 기생을 정점으로 한 전통춤 계열과 1926년 석정막의 신무용 공연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은 최승희와 조택원의 신무용계열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앞서 선대로 활약한 최승희와 조택원의 경우는 그들의 성공과 세계무대를 누리는 등의 화려한 모습이 후배 무용인들에게는 당연히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1920년 대 이후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춤의 유입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더욱 맞물려 기존의 전통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탓에 그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은 당연히 서양춤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 후반기인 1931년에 내한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공연은 한국발레사에 획기적인 의의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무용과 다른 그 서양춤이 우리나라에 직접적으로 유입되기 보다 일본을 경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두 번째 내한공연이 있었던 1939년 5월에 있은 후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들이 일본유학을 통해 그 문하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낳았던 것은 한동인의 일본유학을 한 시점이 1939년이라는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무용가들 사이에선 일본유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친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발레를 배우기 시작, 당시의 유명했던 발레연구소인 엘리아나 파블로바가 운영하는 동경 가마쿠라 발레 연구소에서는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졌는데 이 연구소를 말하자면 해방 전 일본 발레계를 휩쓴 인물들을 거의 이 연구소 출신의 무용가 이었다고 하는데서 일본의 발레역사와 한국발레사와 연관점을 찾아 볼 수 도 있을것이다.

  여기에 잠깐 발레리나 엘리아나 파블로바에 관해 보충설명 하자면 일본 군부의 강요로 대륙에서 일본군 위문공연 중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한 무용가로 엘리아나의 제자들로는 한동인을 비롯해 일본 발레계에 남은 백성규와 임성남, 조광 등을 들 수 있다. 한동인 이외에도 일본발레계의 대부인 백성규와 훗날 한국발레계의 대부로 존재한 임성남 등이 그의 문하에 남아 연관된 계보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한국발레사의 예맥도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사실로 여겨진다.

  일본인으로 귀화한 백성규의 경우는 일본인으로 귀화하기전 한국에서 연희전문학교 출신으로 원래는 연극에 뜻이 있어 동경학생예술좌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서 유치진이 이끄는 극예술연구회에 통합하기로 결정되어 귀국하기로 했다가 해산되는 바람에 형상좌에서 1년정도 활동하다가 남궁련의 권유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레와의 인연을 맺은 그는 훗날 임성남의 스승이자 발레를 전공한 10년 연상의 핫도리 시마다(服部智惠子)와 결혼하였고 향후 왕성한 활동으로 부인인 핫도리시마다 발레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동명의 발레단을 창단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발레사에 있어서 초연으로 기록되고 있는《백조의호수》에 주인공을 맡을정도로 훤칠한 키에 기품있는 용모, 그리고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무용수로서의 장점을 두루 갖춰 일본 발레계에서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 한동인이 백성규와 더불어 핫도리 시마다 에게 사사받았다는 것은  전통 러시아 발레를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수입된 발레라는 것이 러시아 발레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가 택한 일본유학은 결론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정통 러시아 발레를 배울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으므로 그 자신에겐 더없이 탁월한 선택 이었던 셈이다.

  일본에 있을 당시의 그의 일본이름은 기요하라 세이지(淸原誠)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제말기 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창씨개명을 강력히 요구하는 시점이었고 한동인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본이름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일본으로 출국 전 한동인은 부친과의 상당한 갈등으로 인해 많이 처음엔 마음을 아팠지만 유학생활 중에 느낀 새로운 춤에 대한 동경과 달라진 환경은 그를 서서히 변화 시켰고 그런 양질의 변화에 대해 기뻐한 한동인은 식구들에게 편지로 자신의 생활을 흥분된 마음으로 전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그 편지를 보고 감탄한 부친으로부터 화가 많이 누그러져 유학후반기에는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받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유학을들이 통해 정통 러시아 발레를 배우고 돌아온 한동인은 1943년경에 귀국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사회적 정황을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본이 초토화 상태에 놓여졌기 때문에 1930년말 일본으로 무용을 배우러 간 대부분의 무용가들이 속속 한국으로 귀국했고 정지수, 함귀봉, 김민자, 조용자, 김미화, 이채옥 등의 무용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1945년 해방을 맞게 되었고 해방 후 무용계의 주된 흐름인 단체 및 조직체의 연관된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한동인 역시 그 조직체에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단체의 이름은 바로 조선무용건설본부와 조선무용예술협회가 대표적이었고 두 단체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한 한동인은 무용계의 중심에서 활동해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한국최초로 직업발레단으로 기록되는 서울발레단을 창단함으로서 한국발레사의 한 획은 그은 인물로 한국발레사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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