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레단의 한국 발레사적 의의는 국내 최초로 전통 클래식 발레 (Classic ballet)를 <레 실피드> 공연해 한국 발레의 시작이 되었던 점과 최초로 창작발레 <꿩>, <인어공주>과 같은 작품들을 무대화시키는 데 성공한 발레단이라는 형식에 걸맞게 해마다 정기공연을 한 점을 들 수 있다.
서울발레단의 창단공연은 정지수와 장추화의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 서울발레단 창단에 대해 당시 한국무용가 조택원은 다음과 같은 글로 격려하였는데
“......... 조선의 발레무용이 등장하여 관계자들 간에는 물론 일반에 다대한 주목을 끌었다.
우리 조선 사람들도 이만한 발레무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인식시켜준 그 열의에는
과연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
위의 글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무용가로서도 인정한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일단 인정받은 셈이다.
제2회 공연은 1947년 7월 20~21일 양일간 부민관에서 개최되었고 공연된 작품은 <사신과 소녀>, <민족의 피>, <장열>등이 있었고 공연평은 다음과 같다.
"테크닉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신예 김 영의 등장이 큰 수확이나 군무진의 기량 미달이나 내면 파악이 뒤따르지 못한 공연이었다"
는 평을 받았다.
제3회 공연은 명동 시공관에서 1948년 10월 1~2일 제1부에서는 발레조곡 <호두까기 인형>, 제2부에서는 무용극 <블루렛>, 제3부에서는 소품으로 <솔개>, <가을의 숲 속>, <인어>, <사신과 소녀>등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에서 무용극 <블루렛>의 경우는 쇼팽곡 15곡으로 편성되었고 소품 <인어>는 정종길(鄭鍾吉)의 창작곡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 날 공연에서 걸린 입간판이 <블루렛>이었던 걸로 봐서는 한동인이 이 공연에서 가장 염두에 두고 무대에 올린 작품이라고 사료된다.
제4회 공연은 1949년 10월에는 창작발레 <꿩>과 <장미의 정>을 무대에 올렸다. 1948년에 이르러 서울발레단은 전체 단원은 여자 8명 남자 4명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 서울발레단의 소속된 남자단원으로는 정 막, 석 두, 임성남, 조원경 등이 있었고 초기엔 12명 정도이었던 인원이 1950년 6월에 이르러 서울발레단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인어공주>를 무대에 올릴 때에는 단원수가 2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레 단체로는 보기 드문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진 셈이다. 당시의 열약한 상황에 비해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화려한 면모의 결정체는 1950년 6월 제5회 정기공연을 통해 <화려한 원무곡>, <향수>, <가면무도회>, <인어공주>등을 무대에 올려 선 보였는데 그 공연은 한동인을 비롯 유수의 단원들이 기량을 뽐냄으로써 그 가치가 더 돋보였고 만약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우리 발레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를 공연이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낮 공연 중에 한국전쟁이 시작됨으로써 아쉽게도 한 예술가의 예술적 의지와 꿈도 어쩌면 그 자리에서 완전히 그 명맥은 완전히 끊어진 셈이었다. 당시 그 공연의 당대 극작가였고 국립극장장이었던 유치진의 격려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립극장의 막이 열리자 본격적인 발레를 상연해 보고 싶다는 것이 우리들의 의욕 중에 하나였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발레를 하는 분들이 한데 뭉쳐 하나의 일에 협력하지 않으면 공(公)이 안 된다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그래서 국립극장 측에서는 무용가들을 일당 (一堂)에 모여 협동 발 레일단의 결성을 요망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아직도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 발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춘 발레 예술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여러 발레단 대표자들의 열망으로 실질적으로는 협동 발레단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먼 저번에는 공연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서울발레단이 단독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한동인 씨를 비롯한 서울발레단 전원의 일을 위한 인내와 노력, 투지 , 예술에 대한 열렬한 애정, 월여(月餘)에 걸친 눈물겨운 연습, 이러한 것을 볼 때 여러분의 의기(意氣)는 반듯이 성공하리라 확신하고 이번 공연이 아니라 발레의 시금석인 동시에 이 공연의 성과가 가까운 장래가 이루어질 협동 발레단의 촉진제가 될 것을 믿어 마지않는 바이다 “.
극작가 유치진이 한동인의 발레 공연의 격려사를 쓴 이면에는 서울발레단의 제5회 공연이 바로 국립극장에서 열렸다는 점과 당시 유치진이 국립극장장이었다는 점은 무관하지 않다.
국립극장의 설립 논의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은 해방 직후 1946년 초반부터였는데 이후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1950년 4월 29일 역사적인 개관식을 갖고 유치진 작, 허 석 연출의 <원술랑>을 무대에 올리며 국립극장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후 국립극장에서는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인 현제명의 <춘향전>이 공연되는데, 이때 김생 여 지휘에, 고려 심포니 연주가 곁들여졌는데 이때 작품 <춘향전>에 등장한 발레를 보기 위해 이 공연을 보려는 관객이 광화문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한동인이 오페라 <춘향전>의 안무를 맡았고 그 후로도 그는 오페라 <칼멘>의 안무를 맡아 서울 발레단원을 출연시키는 등 주변의 장르에도 그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고 전해진다.
한동인의 서울발레단의 제5회 공연은 그러니까 국립극장의 개관기념의 일환으로 펼쳐진 것이며 그 공연 목록 중에 하나이었으므로 따라서 당시 국립극장장이던 유치진이 격려사를 쓰는 것은 당연했으며 격려사 내용에서 보이듯이 국립극장 공연 중 발레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국립극장 산하의 합동 발레단의 창설도 계획했으나 애석하게도 무용계의 무관심으로 무산되었다고 알려졌다.
이미 1947년 정지수가 월북한 상태에서 발레계의 인적자원 역시 풍부하지 못한 정황도 그 원인 중 하나였으므로 한동인이 국립극장과 연관된 일련의 행사에 적극적이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국립극장은 5천만 원을 들여 내부를 수리했고 또 국내 최초로 호리존트, 기타 조명기구 일체를 수입하여 새 단장하여 극장 분위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으므로 평소 발레의 대중화에 고심해 온 한동인에게는 이런 기회를 져버릴 수 없는 기회 중의 기회 로볼 수 있는 것이다.
임성남의 등장
마지막으로 서울발레단의 제5회 공연이 남긴 의의(意義) 중에 하나는 그 공연에 참가한 남성 무용수들에게 있는데 먼저 가장 눈에 띄는 인물로 한국 발레 역사상 한동인 다음에 선구자로 평가받는 임성남의 등장과 무용예술의 저자 조원경의 출연을 들 수 있다. 먼저 임성남의 경우는 훗날 한동인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발레 역사의 산증인으로 국립발레단 단장을 30년간 역임하였고 실제적으로 한국 발레의 대부로 활동한 사람으로서 이 당시 한동인을 만나 그에게서 수학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 공연에 참가한 임성남은 뛰어난 테크닉과 재능을 인정 받음으로써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였고 또한 맹활약을 하였는데 그것의 도화선은 1947년 전주사범학교 4학년 시절에 전주 도립 극장에서 열린 한동인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무작정 그를 찾아가 제자가 되길 원하여 서울에 있는 한동인에게 발레를 배운 지 1여 년 만에 그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한건 전주사범 졸업 후 서울발레단의 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성남은 출생지 서울, 전주사범 졸업, 1949년 한동인 무용연구소 입소, 취미 수영 음악, 선천적으로 타고난 균형 있는 육체와 원만하고 유머러스한 성격, 노력가인 그에게 많은 앞날이 기대된다고 소개했다. 그 후 임성남은 계속해서 발레를 전공할 생각 해 일본 유학길에 오르고 핫도리 시마다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 러시아 발레를 제대로 배워 옴으로서 우리 발레의 텃밭을 가꾸게 되었는데 그 시작이 서울발레단이었다는 점은 한국 발레의 시작점이 같았다는데 그 의의가 있으니 그것은 한국 발레계의 춤 계보의 한 단면이 되기도 한 셈이다.
반면 조원경의 경우는 당시 이 공연인 <인어공주>에서 군무진에 속해 태풍우(颱風雨)를 담당한 인물로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한 재학 중이던 상태에 경력이 일천한 상태에서 입단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등장으로 그친 인물로 당시 팸플릿에서는 그를 출생지 전북 김제, 전북 중학 졸업, 연대 문과 재학, 취미 음악, 1950년 본 연구소 입소, 조용한 성격에 꾸준한 정열, 무용가에게 알맞은 그 체격에 노력이 필경 코 우리나라 발레계의 제일선에 뛸 것이라고 소개해 놓았다. 조원경은 훗날 한국무용으로 전향 후 1967년에는 무용 서적 <무용예술>을 출판 후 도미해서 외국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한동인에 대한 능력을 인정해준 사람 중에는 일본에서 발레계 에서 발레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활동한 사람으로는 한국계 발레리노 백성규가 있었다. 일본 이름으로 시마다 히로시(島田黃)라고 불리는 그는 연희전문학교 출신으로 원래는 연극에 뜻이 있어 동경 학생 예술좌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단체가 서울의 유치진이 이끈 극예술연구회와 통합하기로 결정되어 귀국하였다가 해산되는 바람에 형상좌에 1년 정도 활동하다가 남궁련의 권유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백성규는 가마쿠라 발레연구소에 만난 10여 년 연상인 핫도리 지에고 (服部智惠子)와 결혼하였다. 이어 부인인 핫도리 시다마 발레연구소를 운영하는 한편 동명의 발레단을 창단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백성규는 일본 발레사에 있어서 초연으로 기록되는 <백조의 호수> 공연 때 주역을 맡았을 정도로 기량이 탁월했고 훤칠한 키에 귀품 있는 용모의 무용수로서 훌륭한 장점이 되어 이후 일본발레협회 회장까지 지냈으니 그의 실력과 역량이 가늠된다고 할 수 있겠다. 여하튼 한국인 백성규가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일본발레협회 회장까지 역임했다는 사실은 사사하는 바가 크다.
한동인은 백성규와 비슷한 시기에 엘리아나 파블로바에게 발레를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백성규의 아내가 된 핫도리 지에고에게도 사사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한동인의 일본 유학을 통해 정통 러시아 발레를 배웠다는 점과 한동인과 더불어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문하에서 발레를 익힌 한국인이 한동인과 백성규라는 점, 그리고 6.25 이후 공백에 처한 우리나라 발레 예술의 터전을 닦은 이가 임성남이 바로 핫도리 시마다의 제자라는 점이다. 그 밖에도 백성규의 제자로는 조광이 있으나 귀국 후 우연한 기회에 스페인 춤에 경도되어 전공을 바꾸었다고 하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 수입된 발레는 러시아 발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의 정점에 한동인이 서 있었던 점이 주목할만한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