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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Jan 06. 2017

한동인의 무용사적 사고(思考)

- 조선무용의 발전을 꾀하며.. 의 전문 -

  남한에서 서울발레단을 결성해 맹활약을 한 한동인은 예술가로서 나름대로의 식견과 혜안으로 발표한 또 다른 글이 있었는데 그중 1948년 판 「예술 조선」 4월호에 ‘조선무용 발전을 꾀하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한 원고가 있다. 70년 전 발레학교에 대한 당위성과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자는 의견을 제시해 발레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의견 피력은 우리가 알아야 할 사고(思考)라 생각되어 그 글의 전문을 공개한다.

 



                       「조선무용의 발전을 꾀하며…」

                                                                                    -  한동인  -   

  "과도기며 건설기인 현 조선에 있어 정치를 위시하여 경제, 산업, 문화, 모든 방면의 거보적(巨步的)인 발전과 향상이 있어야 함은 삼천만 동포가 모두가 해방 즉시로 깨닫고 지금껏 염두를 떠나지 못하는 인내의 노력이며 견고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다소간의 진보와 발양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만하면 하고 숨을 돌리 키기에는 너무도 원대양양(遠大洋洋)한 조선의 성업이다. 

  정치는 정치가의 할 일인 것과 동일하게 나는 문화의 일부인 무용의 발전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며 마음에 재촉질 하려 한다. 외국에 뒤떨어진 조선의 문화, 더구나 무용이라는 것을 돌이켜 보건대 무용을 공부하는 나 자신 부끄러움이 끝이 없으며 또한 가슴을 울렁거리는 희망의 진동을 금치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조선에서의 무용 예술은 모방기를 지나 창조기인 역사의 시작인 까닭이다. 

  병명을 안 병자는 약의 효력이 있을 것이며 완쾌가 멀지 아니하리니… 아직까지의 조선의 무용계를 회고하건대 외국과의 교제가 드물고 끊임없는 외관(外冠)에 허덕이든 이 나라는 문화에 대하여는 너무도 소원하였고 생활에 쪼들리는 민간에게 무용은 「광대」로 취급당하는 천한 직소이었던 것이다. 그 좋지 못한 사상의 굵은 물줄기는 군국주의 왜정 때에도 한결같이 민간을 흘러 그 악정을 무릅쓰고 조국의 문화를 위하여 꾸준히 연마(硏磨)하는 진실한 학도들은 나라 없는 서러움, 이해 없는 사회와 가정, 그리고 나날이 더하여 가는 생활난에 얼마나 가슴을 두드렸던고…. 그것이 민족의 잊지 못할 자유의 해방을 축복받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무용을 불급불요(不急不要)의 좋지 못한 개념으로 천대시하는 서러운 사회가 될 줄이야..

  국가란 한 집을 지음에 대들보와 초석이 되는 정치가 있어야 하나 창(窓)과 천정이 절대 필요한 문화를 어찌 허술히 하랴. 문화는 사회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요, 그 나라의 위세를 말하는 것이거늘․․․․․ 

  이렇듯 중대한 위업을 짊어진 짐꾼의 한 사람으로 나는 조선의 무용발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먼저 절실히 바라는 바이다.  





국립 무용학교의 설립


  먼저 국립 또는 공립의 무용학교의 창립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무용예술협회에서도 수차로 입안도 있었고 몇몇 사람의 무용가들이 의견과 꿈도 교환하여 보았으나 심적․물적의 다대한 원조가 없는 한 힘이 빈약한 조선의 몇몇 예술가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취키 어려운 문제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무용가들은 각자의 힘을 분산시켜 소규모의 연구실에서 그들의 끝없는 이상과 타오르는 정열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하루 바삐 국립 무용학교(國立舞踊學校)가 설립되면 외국에 훌륭한 예술가와 무용교사를 초빙도 하고 졸업생 중 우수한 사람은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 다음 각국에 모두 있는 국립극장과 극장 부속의  무용단이 설립되어야 할 것이다. 장차 건국이 되면 물론 국립극장이며 국립극장 부속의 무용단도 있게 되려니 하고 기쁨이 하나라도 되나 현대 무용예술가들의 오직 하나인 무대 시공관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건대 생각할 바가 많을 것이다.

  

  다음 무용콩쿠-ㄹ에 대한 문제


  경쟁이 있는 곳에 노력이 있을 것이요 노력이 있는 곳에 진보가 있고 , 즉 발전인즉 무용 콩쿠르는 절대 필요한 사업에 하나일 것이다. 이 콩쿠르로 말미암아 신인의 소개도 될 것이요, 일반의 무용 인식도 급속도의 발전이 있을 것이니 문육부 예술과 (藝術科)의 음악콩쿠르가 있는 것과 같이 무용 콩쿠르가 있어야 할 것이며 권위 견고한 신문사 주최로 년 2회는 개최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다음의 각 학교의 무용에 대한 교육방침, 음악교육이 음악예술의 위대함과 각 방면의 모든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그 기초를 연마하는 교육이요, 각 과목 (各科目)이 전부 그러함에 비하여 무용교육은 너무나 몰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여학교, 중학교는 인생의 토대를 닦는 기관이다. 인생의 토대를 견고히 공부하는 한편 무용학교가 없는 현 조선에서는 학교의 틈을 타서 무용연구소에 꾸준한 노력과 누구보다도 괴로움을 무릅쓰고 큰 포부와 이상을 안고 나오는 무용학도 그들을 보조는 못할지언정 무대 무용예술을 좋지 못한 충언으로 순정한 머리에 무리로 넣어주려는 학교의 태도는 참으로 이해키 어려운 문제이다. 

  일리(一里)로는 연구소의 분위기라든가 학교의 태만됨을 염려하는 고마운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좋지 못한 길로 맹진치 아니하도록 반듯이 위에 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함이 학교의 의무가 아닐까?

  무용을 천대시하는 썩은 봉건적 사상이라든가 사소한 감정 또는 입장 문제에서라면 어찌 그 지도자를 경멸하지 아니하며 무심스럽지 아니하랴.( 시내 某某 여학교에서는 소질과 재능이 풍부한 사람은 전적으로 후원과 지도를 게을리 아니하는 것을 볼 때 자연히 머리가 수그러진다). 모름지기 학교에서는 무용 교육을 위한 교사를 둘 것이요 무용가는 후배와 차대를 걸머진 국민의 무용 교육을 위하여 괴로운 학교무용교육을 게을리하지 말 것이다.

 

 다음, 무용가들의 처신 문제


  무용가 각자의 명예나 인기를 위하여 연구 또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이제 옛날이야기다. 현 조선은 무용예술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특히 무용계는 더욱 각자가 수양하며 서로가 고쳐 나아가야 아직까지 서럽던 무용계에 사회의 촉망이 더 커질 것이요, 뒷손질도 없어질 것이다. 다음은 훌륭한 신인이 많이 나타나며 양성되어야 할 문제다.

  현 조선의 옥석(玉石) 혼동의 무용계는 너무도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들은 선배를 위하여 공부하여야 되겠고, 후배를 위하여 수양하여야 될 것이다. 요컨대 자매 예술을 바라는 선배 선생 여러분은 물론 사회 각 방면의 지도와 편달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한동인은 당시 가장 폭넓은 식견과 행동하는 예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발레사 초기에 있어 가장 선구자적인 사람이며 우리나라 발레의 토대를 닦은 사람이다. 한동인은 당대 춤 현실에 첨예한 의식을 바탕으로 발전을 위한 개선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로  위에 나온 글처럼 「조선무용의 발전을 꾀하며…」라는 글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동인이 제기한 일렬의 제안들은 오늘날의 춤 현실에 그대로 인용해도 부족함이 없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창한 대로 국공립 무용학교의 설립, 외국의 유명한 교수 초빙, 신진 무용가의 해외 유학, 국립발레단의 산하 발레학교 설립, 무용의 독립교과 필요성 등을 주창한 점은 한동인이 떠난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달라지지 않은 우리나라 발레계의 현실을 그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원로 무용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 1930~50년대에는 한국 전통 무용과 신무용, 현대무용, 발레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어떤 공연에서는 한 무용가가 한국 무용과 현대무용 때로는 발레 비슷한 것까지도 모방하여 즉흥적인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용가들의 공연 활동과 달리 서울발레단을 통해 오직 발레 작품 활동만을 추구한 것을 보면 한동인은 한국 발레의 개척자라 할 만하다. 

   그밖에도 한동인은 선천적인 부드러운 성격으로 주변 예술인과의 친분을 쌓았고 해방 직후 무용계에서 하는 각종 단체와 조직체에도 활발히 가담했으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창작발레의 창작곡을 위해 성두영, 김생려 등과의 교분을 트기도 하였으며 1950년 4월 29일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춘향전>에 등장하는 안무를 하였는데 당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이 광화문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도 있으며 이후에도 오페라 <칼멘>의 안무에서는 서울 발레단원들을 대거 출연시키기도 등의 모습을 봤을 때 그런 면면을 봐서라도 한동인에 대한 예술적인 의지와 역량은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의상 제작 문제에 있어서도 작품 의상으로는 입기 위해 노라노 양장점을 전문적으로 이용하였고 이곳에서 여의치 않는 의상은 자신이 손수 디자인하여 입힐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니 그의 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일제 치하에서도 러시아와 일본인 발레마스터에게 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발레를 추구한 것은 당시의 무용가들이 얼마나 투철한 국가관과 주체의식을 지닌 예술인이었는지 알 수 있으며 서양의 발레 역사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닌 한국 발레가 오늘날처럼 세계적인 발레스타를 배출하고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등 큰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에서 발레를 보편적인 예술로 받아들이고 무대 예술로 이끌었던 선구자적인 무용가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첫 선구자가 한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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