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립극장의 산하 국립무용단이 탄생되었다. 5.16 군사혁명 이후 국립무용단과 국립오페라단이 창설되었는데 당시 극장장이 임성남을 초대 단장으로 한국무용가 송범과 김백봉을 부단장으로 취임시켰다.
초창기엔 한국무용과 발레가 나눠지기 않았기 때문에 국립무용단이라는 단체명으로 합동 공연으로 해마다 공연을 올리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공립 공연 단체가 만들어졌다 해도 즉각적으로 물심양면의 빠른 지원을 해 주진 않았기 때문에 변변한 연습실 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발레 무용수는 종로 5가에 있었던 임성남의 개인 연습실에서 연습을 한국무용 무용수는 송범의 연구소에서 나눠 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변변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 상태로 도시락을 싸서 연습실로 와서 그저 발레가 좋아서 모여서 연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늦으면 밤을 새워가면서 연습할 만큼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했지만 열정적이었던 무용수들의 수장으로 임성남이 존재했다.
임성남은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주로 한국적 발레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민족 발레를 근간으로 한국적 발레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었는데 그가 만든 작품으로는 <쌍곡선>을 시작으로 <사신의 독백>, <허도령>, <화려한 왈츠>, <까치의 죽음>, <예불>, <오줌싸개의 향연>등의 한국적 창작발레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던 중 1970년대가 들어서면서 제12회 국립무용단 공연을 시작으로 극장 측의 아무런 공식 발표 없이 국립발레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국립극장 개관 20주년 국립발레단 특별 공연」표제를 달아놓고 국립 무용단장 임성남이라는 타이틀의 붙은 것에 대해 극장 측의 입장이 무용단의 해단(解團)이냐 아니면 개명(改名)이냐를 놓고 얼마나 많은 고심이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자세한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함께 활동하던 무용인들과 논의도 없이 국립발레단이라는 명칭을 갑자기 사용한 것에 대해 원리에 어긋난 처사라 반발하고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라며 내부적인 잡음이 생겼던 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결국 그 밑바탕에는 '국립발레단'이라는 타이틀은 '임성남 발레단'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전제하에 놓고 보면 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한국 발레 역사에서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의 분리는 당시 무용계가 반드시 겪어야 할 성장통과도 같았다고 생각한다. 이 일로 인해 국립발레단의 이 공연을 국립발레단의 첫 무대로 규정한 무용학자 안제승은 임성남 단장의 프로그램 인사말을 인용해 "발레는 안무가의 능력과 무용수의 수준이 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작품다운 작품으로 구현될 수 있다" 전하며 제12회 국립발레단 이 공연을 두고 우리나라 무용사의 신기원(新紀元)을 구획했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국립발레단에서의 활동
명동 국립극장의 시절이 끝나고 1974년에 남산에 있는 장충동에 새로운 국립극장이 생기고 임성남의 안무로 만들어진 국립발레단의 최초의 한국적 창작발레 <지귀의 꿈> 이 초연되었다. 이후 1976년에 선보인 <지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클래식 전막 발레 공연이었으며 1977년에 올린 <백조의 호수> 전막을 올렸는데 6일간의 공연에 입석까지 매진되는 진기록으로 한국 발레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977년에는 <호두까기 인형>이 전막 초연되었고 1978년 <신데렐라>는 일본인 이시다 다네오를 초청해서 전막 초연되었으며 1980년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럽의 객원 안무가 프레드 마르티니를 초빙해 현대 창작 발레로 무대에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198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코믹 발레 <배비장>을 초연하였지만 초연 이후에는 재공연 되지 않았고 1986년에는 <춘향의 사랑>이라는 창작발레도 만들어졌는데 이는 당시 1986년 아시안 게임이 개최됨에 따라 외국인 손님에게 한국적인 발레 작품을 소개하고자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했으며 1987년에는 <노트르담의 꼽추>가 또 한 번 일본인 이시다 다네오를 통해 안무되어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고 1988년 <왕자 호동>이 임성남의 안무에 의해 한국적 창작 발레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 임성남의 대표 안무작이기도 하다. 1989년에는 임성남의 안무로 올린 <카르멘>이 있었는데 작품 전막이 일본에서 공연된 국립발레단의 첫 번째 해외 공연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91년에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출신의 안무가 마리나 콘트라 체바 초청으로 <돈키호테>가 국립발레단의 무용수들로 국내 초연이 될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의 퇴임
그는 1962년부터 1992년까지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무용단의 단장으로서 그의 무용인생은 쉼 없이 달려왔지만 1992년에 12월 <호두까기 인형>을 퇴임 공연을 끝으로 30년간 맡았던 국립발레단 단장직에서 내려왔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음을 예술가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고 자신의 은퇴소감을 밝혔으며 특히나 1977년 4월에 올린 <백조의 호수>의 전막 공연에 있었던 매진 행렬에 대해 아직까지도 가슴 깊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발레단을 떠나는 일 또한 예술가에게는 은퇴는 없지만 임기가 만료되어 떠난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발자취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립발레단 재직 시절 그가 단원들과 올린 정기공연은 70회가 넘고 그가 안무한 작품은 400여 편이 넘는다. 무엇보다 그가 재임 시절부터 무대에 올렸던 작품들은 정통 클래식 발레부터 한국적 발레 및 현대 창작발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발레 작품들을 해마다 선보였으며 또한 그가 길러낸 제자들도 1천 명이 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독립적인 행보의 중심에서 그가 지닌 가장 큰 의미는 본인 스스로 갖고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바탕으로 평생 자신의 인생을 춤에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노고와 희생 덕분에 그는 그 스스로가 증인이 되어 우리나라 발레 역사에 주춧돌로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며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30년간 국립발레단의 단장으로 우리나라 발레 역사에 큰 획을 그으며 자신의 52년 외길 발레 인생이 한국 발레의 역사의 가장 큰 줄기로 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국립발레단의 역사가 어쩌면 한 개인의 역사와도 맞물리기도 할 수 있었던 큰 발자취를 남긴 셈이다. 그렇기에 임성남은 한국 발레의 개척자로, 큰 스승으로, 정통한 예술가로, 한국의 발레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남게 된 것이다.
어두운 이면(裏面)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무용사적 업적 또한 그저 극찬으로만 이루어질 순 없었다. 특히나 그가 국립발레단 단장으로서 30년간 역임한 부분에 대해서 그가 독재자처럼 보인 부분이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놓고 보면 러시아 발레를 기초로 한 발레를 정통으로 배워와 우리나라 발레 역사에 제대로 된 뿌리로 내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수도 없다. 당시엔 시대적인 상황이 더없이 불운했고 위험했기 때문에 한동인을 비롯한 당대의 무용가들이 한국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많은 무용가들이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발레 역사는 또 어떻게 뒤바뀌었을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발레를 새롭게 개척하고 지금의 발레와 연결시킨 그 축의 중심점에 있었던 사람이 무용가 임성남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그는 외롭지만 처절하게 독보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나라 발레의 개척자로, 스승으로, 정통한 예술가로 무엇보다 "대학의 위용이 춤의 가치를 능가하던 시절에도 춤만을 고집한 순수함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우월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문애령 무용평론가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공감한다. 예술가로서의 외로움을 자신을 늘 고독하고 외로웠다고 기억했지만 그의 자서전을 봐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고 지지했는지 알 수 있다. 한때 독재자라 불리기도 했던 그의 삶이 지금이라도 좀 더 나은 평가로 다가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한국 발레의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선구자이었고 또한 개척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