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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Oct 07. 2021

한국 발레의 선구자 임성남(3)

episode1. 일인자를 만나기 전의 선입견


  고백이라는 표현이 맞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많은 것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 감정이 딱히 어떤 마음의 어떤 상태이었다고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저 겁이 많이 났고 발레계의 최고 권력자로 느꼈던 분을 만나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일천한 무용 역사 지식만을 가지고 자택으로 전화를 드려 시간 약속을 잡는다는 거 자체가 더없이 떨렸던 기억도 나고 무엇보다 만남을 거절하실까? 싶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댁으로 전화를 드려서 자기소개를 하고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 뵙고 들어야 할 이야기가 현재의 바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훗날 미래를 기약하는 글로 남기 위해 미리 뵙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 또한 쉽게 입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모든 변수를 안고 연락을 드렸던 내 마음도 사실 내 마음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땐 어쩌면 그렇게 겁이 없고 막무가내 같았던 건지 싶은 그런 염려스러운 마음도 컸지만 그래도 시간만 내주신다면 꼭 뵙고 싶었던 마음속 깊은 곳의 용기에 대한 진심에 있어선 지금도 한 치의 의심은 없다.

  무엇보다 검증된 매체의 정식 인터뷰가 아니었기에 설령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해도 나는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을(乙)의 입장이었지만 약속 장소에 10분 전에 정확히 나와서 기다려 주고 계셨다. 불행히도 그날은 전해드리고 싶었던 논문을 놓고 와서 다시 챙겨 나가느라 약속 장소에 한 5분 정도 늦었는데 그 때문에 인터뷰 전에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발레를 배울 때 시간 약속에 대한 중요성을 시도 때도 없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정말 인터뷰를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 앞섰기 때문에 놓고 온 논문을 가지고 오느라 10분 정도 늦었다는 이유로 시작부터 크게 혼은 났기 때문에 죄송하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시작으로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찬찬히 인터뷰를 했고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엔 드시던 맥주 안주에 나왔던 땅콩도 몇 줌 건네주시면서 맛보라고 하시던 환한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episode 2. 1시간 30분의 사나이


  생전의 그를 두 번이나 인터뷰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해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장소에서 두 번, 정확히 1시간 30분 동안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집중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마치 자신의 인생을 대본으로 만들어 머릿속에 갖고 다니시 분 같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악보를 가지고 있지만 보지 않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처럼 그렇게 막힘없이 술술 수많은 질문에도 대답해주셨도 점도 기억나는 유난히 기억나는 대목이다. 그의 어법은 유머러스 하지만 특유의  호탕한 존댓말 안에는 따뜻한 존중이 들어 있음이 느껴졌었다. 그러던 중 만났던 무용가들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혹시 인터뷰를 약속하고 거절하거나 펑크 낸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더니 이런 말씀을 해 주셨는데  "사람을 보는 기준에 있어 시간이 있는데 만약 세 번 이상 만남을 거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인터뷰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라고 되물어 주셨다. 앞서 말한 대로 상대방의 진심을 아는 첫 번째 조건 중에 하나가 시간을 잘 지킬 것, 약속을 어기지 말 것, 만났으면 거짓 없이 대화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 마음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질(質)보다 양(量)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또한 그런 마음 앞에서조차 당당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날 이후, 보이지 않은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일을  오래 할 건데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오랫동안 튼튼한 마음을 안고 이 일을 하려는 진심이 더 커야 다치지 않고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무용수로서의 삶을 이야기하실 때 우리가 시간이 남아 돌아서 춤을 추는 건 아니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남들이 보기에 시간이 남아서 춤을 추는 것처럼 비꼬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을 목숨 걸고 하는데  남의 일이라고 쉽게 폄하하듯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는다고 하시며 혹시 네가 글을 쓰더라도 춤을 추진 못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발레의 기본 운동인 발레 바( Ballet bar)라도 하면서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네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도 너의 글을 누구보다 존중해주겠다고도 하셨다. 특히나 그가 그렇게 주창하던 발레학교의 설립에 관한 이야기도 인터뷰 자리에서 들었다.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받아서 성장해야 할 무용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실 때나 출강하던 예원학교나 서울예고 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땐 말끝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듯한 애정도 느꼈다. 그래서 춤은 아무나 추는 게 아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고 싶다고 모두가 춤을 출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개된 장소에서 한 인터뷰이었지만 첫 번째 인터뷰 때는 지금처럼 구술채록(Oral history)이 훌륭한 자료로서의 가치로 인정받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녹음기를 가져가서 대화 내용을 녹취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고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훗날 이 자료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쓰일지 불안하다고 하셔서 가지고 갔던 녹음기는 가방에 다시 넣고 노트와 펜만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그날이 세월이 이렇게 흘렀음에도 아직도 어제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한국 발레의 최고의 스승


  예술가의 삶도 멀리서 보면 꽤 거창한 것 같지만 결국 내면을 들여다보면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당당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남다른 기품과 위용이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공과사를 칼처럼 구분했고 시간 약속도 칼처럼 정확히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공직생활로 사치스럽지 않아도 보통 사람이 누리는 누릴 만큼의 삶도 조금은 여유롭게 지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같았다. 첫 번째 인터뷰 후엔 댁으로 가시는 길이라면서 나의 행선지에 웃으면서 내려주고 가셨던 기억이 난다. 연식이 꽤 오래된 차인 것 같았는데 잘 달래서 태워다 주셨을 때 회고록에 나온 경험담처럼 나도 놀랐던 기억이 났던 이유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꽤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에 그가 살아온 삶을 회고하는 자서전 <하늘 높이 꿈꾸며>가 세상에 나왔다. 그 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발레를 사랑했고 그의 가족들의 희생 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잘 나와 있으며 책의 페이지마다 곳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술가로서 응원하고 지지했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살아서는 더없이 힘들고 고된 예술가로서의 삶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그가 치열하게 살아온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무용수부터 안무가에 이르기까지 한국 발레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발레 역사에서 마리우스 쁘띠빠의 이름을 놓고 이 시기를 '쁘띠빠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마리우스 쁘띠빠는 러시아 발레의 스승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리 발레 역사의 최고의 스승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코 임성남이라고 말할 것 같다.      




일시:  2000년 10월 11일 수요일 

장소: 하이야트 호텔 커피숍 

일시: 2001년 2월 4일 일요일 

장소: 하이야트 호텔 커피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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