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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Oct 12. 2021

한국 창작 발레 토착화에 힘쓴 진수방

진수방(陳壽芳) : 1921~1995

출생과 이력


   진수방은 1921년에 서울에서 의사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경성 사범 부속 보통학교 시절에 무용에 취미를 갖게 되는데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앞서 소개한 무용가 배구자가 활동했던 일본의 종합예술단체인 덴가쓰예술단(天勝座)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30년대 10대 나이에 무용계에 입문한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특히나 공연을 보고 덴가쓰에 들어간 것과 그 일을 위해 집을 떠난 것도 당시의 시대상과 엮어 생각하면 보통 남다른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소감을 전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 나는 동무들과 함께 구경을 가서 그들의 춤과 노래에 내 마음 전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몰래 이틑날도 사흗날도 거기에 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서울을 떠나던 날, 나도 그들을 따라 떠나게 되었습니다. "   - 진수방의 반(半)의 반생기. 1936년 4월  잡지 '여성' -



  덴가쓰의 활동은 앞서 근현대사의 무용가로 알려진 배구자와 같은 활동을 한 이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얼마만큼의 덴까스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측컨대 여러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 덴가쓰에서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던 걸로 예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진수방은 그녀의 나이 14세 때부터 1935년 8월 한 달 동안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독자위한납량무용음악의 밤>에 조택원과 함께 순회공연을 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이른 나이에 활동을 시작했고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한성준 문하에서 조선춤을 배우기도 했으며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가와카미 스즈코(河上鈴子) ), 러시아인 크리아스 노바 등 여러 스승 밑에서 다양한 춤을 섭렵하기도 했는데 스승인 그의  조택원의 권유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스페인 춤과 발레를 익히기도 했다고 한다.

  1940년부터는 무용연구소를 세워 아동무용과 예술 무용과를 분반하여 무용 대중화와 후배 양성에 힘썼고 이때 제자로 무용가 주리가 등장한다.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가 결성되었을 때 발레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친일행위로 비난받고 있던 칩거 중이었던 조택원도 같은 해 조선무용예술협회가 창설되었을 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공연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이 공연에서 진수방은 <아리랑 회상곡>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때 한동인과 정지수, 진수방은 발레부 위원으로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발레 대중화에 기여한 바가 있다는 무용 역사의 기록도 있다.  

  

의상 디자이너 노라노가 만든 카르멘 의상을 입은 무용가 진수방의 포즈

  스페인 무용의 권위자인 크리아스 노바에게 춤을 배운 진수방은 1950년 귀국발표회에서 <카르멘>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무대의상을 담당한 우리나라 1세대 디자이너 노라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든 의상을 입고 장미꽃을 입에 물고 춤을 추는데 진수방을 보는데 여러 겹의 프릴이 달린 스페인풍의 스커트를 한 손으로 흔들며 캐스터네츠를 높이 들고 ‘따, 딱, 딱’ 하고 소리 내며 춤을 추던 모습이 마치 요정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의 활동


  한동인이 최초의 발레 독립단체인 ‘서울발레단’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진수방은 개인발표회와 한국 발레 토착화 작업에 역량을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무용계는 자신의 전공이 딱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에 진수방 역시 한국무용과 발레를 겸해서 활동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승인 조택원의 작품 <만종>에 출연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무용평론가 박용구와의 월간 무용지 대담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러던 중 스승의 권유로 상해(上海)에 건너가 이만 탄조와 마담 그리아조나바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며 무용 실력을 키웠고 그런 향학열은 멀리 파리까지 건너가 사사하기를 원하였지만 가족들의 반발로 계획이 무산되자 플로스 티반스라는 무용가가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개인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이어 1954년 11월에 당시에 활발히 만들어지던 발레단의 창단에 합류해 자신도 <한국발레예술무용단>을 창단하였으나 다른 여느 발레단과 마찬가지로 창단 후 바로 해단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고 1956년에는 한국무용가 협회장이 되었고 1959년에는 한국무용협회를 새로 발족하여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진수방에 관한 여러 가지 신문기사를 보는 중에 유독 이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다른 이들이 나더러 ‘왜 춤을 추는 거냐’고 물으면 나는 그만 웃어버립니다. ‘왜 추긴 왜 춰요. 춤추고 싶어서 추는 것뿐이지요. 이유가 있나요?’ 정말이지 나는 나의 청춘을 여기에 바쳐왔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패배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힘을 다 바쳐서 춤추고 싶을 따름입니다. 춤에 임하는 태도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 진수방. 발레단과 그 운영- 예술로서 존립하려면. 조선일보, 1958.12.23   




  1960년 작 <괴로움과 즐거움>은 한국무용 춤사위를 접목한 한국적 창작발레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잘록한 블라우스에 비치는 바지를 입고 작은 검을 사용하였고 음악은 농악을 사용하였다고 하였고 당시에 이 작품은 굉장한 화젯거리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다음 해인 1961년 진수방은 한국 발레의 진면목을 보여주자는 열망으로 다시 또 국악 명인인 지영희와 조병학 편곡의 음악을 사용하여 <그랜드코리언발레>를 창작하고 초연하며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런 다양한 시도들 때문에 진수방은 한국적 발레를 토착화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미국행


  앞서 말한 대로 진수방은 한국적 창작 발레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데 일조를 했다. 1962년에 국립무용단이 설립되었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내부적인 갈등으로 무용단의 임원직을 사퇴하고 돌연 갑작스럽게 미국행을 택하게 된다. 이런 급작스런 행보의 근간의 이면에는 한국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고 또한 1963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제세버 발레스쿨’ 원장의 초청으로 제대로 된 발레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재미 무용가로서 미국 순회공연을 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게 되는데 미국에서 무용 수업 역시 바가노바 클래식의 중요성을 알고 클래스 중심의 교육으로 제자 양성을 하였는데 이것이 발레의 표준이라 믿고 가르쳤다. 그러던 중 조루나 그룬다 라는 미국인과 1969년에 결혼하였는데 남편의 권유로 1972년부터 공연을 시작하였고 1974년에는 보르만 가퍼노 센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무용가로서의 진수방은 중국 상해 무용전문학교에서 발레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도미 후에는 디아길레프, 세계적인 무용 교육자 도코우도프스키 등에게 사사하였으며 특히나 한국 발레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이력은 러시아에서 전통 러시아 발레 기법인 바가노바 테크닉을 배워 이를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한 무용가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episode


  진수방의 발레 계보는 무용가 주리를 비롯해 조카이자 제자인 진수인이 이어갔다. 그녀의 조카는 전 국립발레단의 발레단원이었던 진수인으로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레리나 김지영의 스승이기도 하다. 지금의 발레 교육에 있어 도제식 교육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예술이 스승에게 전달받는 도제 시스템이라는 기준에서 놓고 보면 진수방은 무용가 이전에 많은 무용가들에게 전문적으로 사사를 받았다는 점이 다른 예술가들보다 더 눈에 띄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수방의 조카를 인터뷰로 만났던 건 친가에서 같은 예술 계통의 스승과 제자로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꼭 만나보고 싶었던 무용 가중에 한 분이었다. 인터뷰 당시에 무용학원을 운영하고 계셨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뵐 수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떤 선생님께 배웠고 나의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말에는 강한 엑센트가 있었다. 우리나를 대표하는 발레리나 김지영도 한 인터뷰에서 스승인 진수인 선생님께 무엇보다 감사한 부분은 해외 연수나 워크숍에 꼭 참가하게 하셨고 그 덕분에 어린 나이지만 미국 뉴욕에 가서 도쿠도우프스키 선생이나 진수방 선생님께도 배웠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다른 그 예술보다 발레는 누구한테 배웠냐를 그 어떤 장르보다 중시하는 분위기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러시아 태생의 발레 마스터 도코우도프스키에게 발레를 배웠다는 자부심이 그 어떤 이야기보다 자신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춤이라는 고유 영역에서 언제나 품위를 지키고 싶어 했던 그녀는 '항상 모든 테크닉에 정직하고 자기 테크닉에 책임을 다해야 하며 모든 실수에는 변명이 없다'는 말을 생전에 자주 할 정도로 춤에서 만큼은 더없이 엄격했던 모양이다. 젊은 시절 '한국의 비비안 리'로 불리던 무용가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평생 춤에 올인하고 살다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95년 8월 13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진수인 인터뷰


일시: 1999.12.7. 화요일 / 2000년 3월 25일 

장소: 역삼동 진수인 무용학원 

  


참고문헌 및 사진


진수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호연.  한국근대무용사. 민속원

진수인. 춤과사람들. 1999년 6월호 34~35p

발레리나 김지영. 클래식에서 컨템포러리까지. 대담:김채현.2014.08.19.

김순정. 창작과 교육에 열정을 받친 무용가 진수방. 서울문화투데이. 2019.02.15

신문기사: 춤에 대한 열정 하나로. 진수방 중앙일보2012.06.25

신문기사: 따뜻한 마음-손을 맞잡고 진수방. 경향신문 1962.12.20

신문기사: 진수방 여사 곧 도미(渡美) 무용연구소에 입소. 동아일보. 1962.12.4

신문기사: 진수방무용발표회 박두. 동아일보.1961.6.15

신문기사: 무용과 음악의 밤. 동아일보. 1935.7.29 

신문기사: 진수방. 발레단과 그 운영-예술로서 존립하려면. 조선일보.1958.12.23   

무용가 진수방님의 메인 사진은 구글에 이경모님 사진에서 추출한 사진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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