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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Oct 15. 2021

국내 초창기 발레리나에서 스페인 무용가로의 변신

주리(朱梨): 1927~2019

출생


 1927년 경북 강계(江界)에서 평생 국회의원을 지내신 아버지 주운성 씨의 외동딸로 태어나 주리의 나이 4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유모 손에 컸다고 한다. 본명은 주애선(朱愛善)이었으나 스승이었던 진수방이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위해 예명을 주어진 것이 지금의 이름인 붉은 꽃이라는 뜻의 주리라는 예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무용가로서의 이력


   경기 여자대학 (현 경기대) 체육 무용과를 졸업하고 1946년 도일하여 마스다(益田隆)와 사다네(貞江界)에게 각각 사사하고 귀국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송범과 이인범 주리가 주축이 되어 피난지인 부산에서 <왕자와 백조>등의 소품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2년 한국무용단 여성 제1 무용수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3년에는 주리발레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양성에 주력하였고 작품발표회도 계속 가졌다.

   1955년 제1회 첫 발표회에는 <흑의 단검>, <밤이면>, <서반아의 밤>, <바다의 야상곡>, <세비 리아나> 등이 있다. 1959년 4월엔 자신의 이름을 건 발레단을 창단하였으나 연이어 해단하였고 100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임성남과 조광과 함께 한국 발레단을 힘을 모아 창단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62년 국립무용단에 생기자 단원이 되어 송범, 임성남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해 왔고 국립발레단의 전신인 국립무용단에서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립무용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서 주리는 제4회 공연 때부터 자신의 안무작을 무대에 내놓기 시작하는데 그 작품들은 <푸른 도포>, <무희 타이스>, <론도 카프리치오>, <스위트 에스판요라>이었다. 제2회 공연에는 송범의 작품 <검은 태양>에 출연하였는데 안무자의 높은 이상에 반해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져 관객들의 이해가 적었고 자신의 안무한 작품 <푸른 도포>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러시아엔 러시아 발레가 있고 아메리카엔 아메리칸의 발레가 있듯이 한국에서는 한국 발레가 있어야 한다는 의욕과 확신에서 이반 작품에 전력을 다했다”




고 하였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안무자와의 생각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발레의 튜튜(tutu)가 한복저고리를 입고 토슈즈로 애디튜드(Attitude)를 하고 두 팔로 너울너울하는 동작을 보고 관객들이 그것이 한국적 발레라 여기진 않았던 까닭이다. 이미 그전에도 주리는 자신의 발표회에서 이런 식의 빈축을 산 적이 있어서 더더욱 그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가 하고자 했던 발레의 모티브는 한국적 발레를 하고자 했던 마음은 분명했었던 것 같지만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을 만큼의 작품이 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이런 주리의 국립무용단에서의 활동은 제8회를 공연을 끝으로 볼 수 없었고 그러던 중에 한국무용협회 송년 무용발표회의 공연을 시공관에서 했는데 이를 본 스페인 마드리드 대사의 부인이었던 스레인 부인의 권유로 스페인에 가게 된 계기는 "한국에도 이렇게 카스타 넷을 멋지게 치는 여인이 있었군요. 왜 본고장에 가서 공부하지 않아요?"라는 감탄으로 이어져 한 무용가를 유학의 길로 올려놓았기 때문에 1970년 스페인 왕실 무용학교의 장학생이 되어 출국하게 되었다. 이로서 주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스페인 무용을 배우게 된 무용가가 되었는데 이후, 근 30년간 스페인에 살면서 스페인 무용에 주력해 길러낸 제자만도 200여 명에 이르고 1999년 귀국해서 한국에 돌아와 정착 후에도 스페인 무용연구소를 만들어 제자 양성을 하였다. 스승이었던 진수방처럼 무용수로서의 전성기를 지난 나이에 한국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서 춤을 배운 이력은 기존의 무용가들과는 다른 행보이기도 하다. 그 모습이 닮은 듯 다른듯한 그러면서 오버랩처럼 겹치는 그림으로 보이기도 했다.


Episode


  조선 악극단 출신의 무용가 주리의 경우는 발레를 시작해 스페인 무용으로 전향한 독자적인 무용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발레리나 및 안무자로 활동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기존의 클래식한 발레만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진 못한다며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인간 내면의 절규와 울분을 쏟아낼 수 있는 춤이 스페인 춤이어서 그 춤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걸 보면 그래서 어쩌면 발레리나에 가깝다기보다는 플라멩코 댄서에 가까운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국적인 외모와 더불어 인터뷰 당시에 보여준 독특한 목소리와 예술가적 기질과 그리고 우리 무용사의 한 부분에서 서있던 노 예술가로서의 시대를 풍미했던 한 부분의 이야기들은 마치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정도이었다. 그것은 어떤 풍파와 괴로움 앞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만 걸어가면서 살아온 예술가로서의 느낌이어서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한 길만 걸어온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단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무용가로서 스페인 무용으로 전환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인터뷰의 대부분의 내용이 스페인 무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무리가 된 느낌이 있었지만 과거 속의 그녀는 무용계 단짝이었던 송범, 주리 발레연구소를 함께 운영하면서 충무로에 있는 무용연구소에서 15년 이상 후진양성을 하기도 했었고 국립무용단 시절에는 그 어떤 발레리나보다 활발하게 활동한 초창기 무용가 중에 한 명이었다. 구순이 다 되는 나이에까지 스페인 춤을 추었던 걸로 알고 있다. 발레만으로 활동했다면 그리 길지 않은 생명력의 무용가로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타국의 민속춤에 자신의 생명력을 넣어 출 만큼 춤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했던 그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리 인터뷰 


일시:2000년 10월 10일 화요일

장소: 압구정동 주리 무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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