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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Oct 08. 2021

한국 무용극의 대부 송범

송범(宋凡) : 1926~2007

출생과 성장과정


  그는 1926년 3월 25일 충북 청주 영운동에서 아버지 송내순(宋內順), 어머니 윤복(尹福) 씨의 5남매 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송철교(宋喆敎)이다.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는 아버지는 기억조차 못하고 형님 한 분과 누님 세 분이 계셨는데 화가이었던 형님 덕분과 어머니의 큰 반대가 없이 어렵지 않게 무용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가 무용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힉년때 최승희의 전성기 시절의 춤을 보고서 무용가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게 되는데  그는 양정중학교를 다닐 당시 공부를 잘해서 의사가 되라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본인이 무용가의 길을 소망하여 경성 의학부에 원서를 제출하고도 시험 당일 음악감상실로 향한 송범의 당돌함은 화가이었던 형님의 도움으로 가능했었다고 한다.


춤의 입문 계기


  최승희의 무용을 보고 난 후에는 집에서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하여 그런 소질을 형님에게 인정받아 최승희에게 사사할 요량으로 북으로 갈 뻔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단계에서는 무마되었기 때문에 그의 나이 14세에 형님과 친분이 있던 조택원 문하생이 되어 무용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성 무용가 조택원은 이시이 바꾸(石井漠)스타일의 워킹 발레라 불리던 일명 '하루쿠 발레'를 40분 정도 되는 동작을 열심히 배웠는데  조택원은 제자들을 통해 "무용은 늘 어려운 것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조택원이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송범의 다음 행보엔 일본에서 건너온 한동인과 정지수 같은 무용가들에게 정통 발레를 배웠고 또 다른 무용가들에게 인도무용과 스페인 무용도 배우기도 했었고 특히나 한 동네에 살았던 한국무용의 대가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배움으로써 이렇게 다양한 춤을 배우고 섭렵한 덕분에 그의 무용가로서의 삶도 그를 대성하게 함에 있어 이 춤들은 다양한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다양한 춤을 배우고 기교를 체득하고 이를 더욱 연마하여 하나로 통합되는 방법을 익히고 싶어했던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 같은 작품을 우리나라 춤을 접목해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를 두고 무용평론가 이병옥은 송범의 청년기적 예술성향은 현대무용 아니면 모던발레의 성향이라고 말했고 송범의 장년기 무용기의 특징은 서양 고전발레의 서사적 기법을 차용하여 발레기법적인 한국무용극을 완성하였다고 정의하였다. 


스승과의 일화


  8.15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최승희 제자인 장추화 문하에 들어가서 인도춤을 비롯, 마리 뷔구만 (Marry Wiegman)계의 현대 무용을 습득하면서 무용계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때의 송범은 스승과의 일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이북으로 끌려가던 장추화 선생은 우리 보고 자신은 사상문제와 무관하게 단지 무대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북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송범의 집으로 일부러 사람을 보내 극장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다행히도 월북과 무관하게 되었다고 하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추화가 가르쳐준 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피력하였다. 스승이 가진 무용의 한계로 인해 갖게 된 생각이 있다면 ‘위대한 스승 밑에는 위대한 제자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위대한 스승 밑에서 배워서  따라 하기에 급급하다면 진정한 무용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생각들로 인해 송범은 나름대로의 자신의 무용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해야 했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용계 데뷔


  그가 말하는 공식적인 첫 데뷔작은 1948년 스승인 장추화와 함께 한 작품은 <습작>이다. 무용 평론가 문철민은 미래가 촉망되는 신인이 등장했다며 송범의 예술가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그의 불후의 명작인 <출진>을 내놓았으며 1950년에 개인발표회를 준비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무용가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6.25 전쟁 때는 잠시 소강상태이었다가 춤지의 조동화의 권유로 급조된 전시 무용단체 송범은 대구로 가 육군 정훈국 소속 문화공작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구에서 만든 작품 <불의 희생> (1950)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었고  이후, 1952년부터 <망향>, <양자강>, <유랑>, <전선>, <전승보>, <힘과 선>, <영원한 자유>, <4285년>, <동란>등을 내놓았고 1955년에는 <생존경쟁>, <공장지대>, <벽>, <인도의 벽화>를 1956년에는 <패배자>, <죽음의 승리>, <항거>등의 현대무용작품들을 내놓으며 성공한 무용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특히나 "작품 <패배자>는 모던 발레 스타일의 창작발레로 국내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는 조선일보의 소개가 있었던걸 보면 한국적 창작발레의 작품으로서의 높은 성과를 일궈낸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당시 이 작품들의 특성은 부조리 속에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울분을 보여주고 항거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고 하고 현존하는 한국무용가로 드물게 1955년에 코리아 발레단을 창설하였고 195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발레로 이행(移行)한 선언한 송범은 <환상교향곡>, <유쾌한 휴일> 등을 만들었고 이어 다음 해에 <백의의 여인>, <무도회의 권유>등 본격적인 발레 작품을 내놓았다. 이때의 작품들 중에서 창단 공연물 <인도의 연가>에서 정통 클래식 발레의 테크닉을 우리 체질에 맞는 발레단으로 개발하는 역량을 발휘하며  1959년에는 모던발레 계통인 <현대인>을 상연하였고 1960년에는 <백야>1961년에는 <기항지>등을 만들었다.

  무용평론가 성기숙은 송범의 이 시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 시기 송범의 예술적 정체성은 현대무용 내지 모던 발레로 모아진다. 당시 혼란한 사회상이 표현성 강한 춤으로 표출되어 주목을 끌었다. 선명한 신체선이 강조된 날카로운 포즈와 마임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연기, 거칠고 직선적인 선과 한국춤 특유의 곡선이 교합(交合)을 이룬 양감적 느낌의 움직임 미학이 호소력 있게 발현되었다. 이렇듯 현실인식에 바탕 한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 스타일과 함께 이국적 낭만풍이 서려있는 서정적 작품들도 이 시기 송범의 춤 경향을 대변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여하튼 송범은 소품 위주의 다작(多作)을 통해 최승희, 조택원의 신무용 예맥을 잇는 한편,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창작성을 토대로 6·25 전쟁 이후 황무지에 놓인 한국 춤을 재건하고 그 토양을 다져가는 역할의 선봉에 서게 된다. "





한국무용으로의 전향


  1960년대 이후 송범의 작품 활동은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발레로 입문해 현대무용을 거쳐  그의 작품들이 이젠 한국무용의 전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1962년에 발족된 국립무용단의 창단은 그의 예술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5.16 혁명 이후, 쿠데타로 상징되던 불운한 이미지를 지우고자 하는 '문화주의'의 등장으로 한국춤을 재건한 무용가들의 보상이 이루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한국춤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키게 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실제적으로 국립무용단은 창단 이후 한국춤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춤들의 공연에 올려졌는데 송범을 비롯한 여러 한국무용가들과 발레 무용가들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대의 리더로 송범과 임성남이 한껏 주목받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국무용과 발레는 바로 분리되진 않았지만 결국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 시대를 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서로 각자의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송범은 무용가로서의 입지부터 안무가로서나 국립무용단의 단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렇듯 송범은 임성남과 마찬가지로 30여 년간 우리 한국 무용계의 '한 지붕 두 가족'의 비정상적인 형태지만 양대 산맥으로 존재하며 군림하던 시절을 지나게 된 것이다.

  그가 1973년부터 국립무용단의 단장직을 역임하면서 송범은 '무용계의 역사가 그 개인의 역사'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무용계에 군림해온 인물이자 탁월한 지도력과 적응력으로 전후 한국 무용계를 이끌었다.   

  이러한 무용인생을 살아온 그를 두고 무용평론가이자 지인이었던 김상화는 그의 작품생활에 도약대가 된 피난생활의 체험이 그를 자라게 했다고 했으며 무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음악 감상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몸의 기능을 무용화시키는 작업을 하였고 사진예술을 접하면서 미적 감각을 키웠다고 소개하였다. 송범 자신 또한 자신의 회고 인터뷰에서 춤은 자신의 신앙이었고 사랑이었고 생명이었다고 여길만큼 무용에 대한 절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평론가들의 전반적인 평가는 현대무용과 발레를 거쳐 한국무용의 대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무용역사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무용언어를 습득해 표현영역을 확대를 꾀했던 남다른 무용에 대한 안목과 이해를 갖춘 그의 혜안과 노력 또한 국립무용단의 40년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정점에 있을 수 있었던 비결로 꼽기도 했다. 


episode


  먼저 한국 발레 역사의 인명을 다룰 때에 가장 고민했던 무용가는 바로 송범이었다. 송범은 우리나라 무용계 중에서도 한국무용의 대표적인 무용가임을 전제해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족을 붙이는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의 무용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스타 무용가임이 분명해도 한국 발레 역사에 그가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원하는지는 확인된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고심 끝에 그를 이 페이지에 넣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백한 그가 춤을 추어온 삶의 궤적에서 그의 춤 인생을 들여다보는데 한국 발레 역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때 서양 예술 춤인 발레를 춤추었지만 훗날 한국무용으로 전향한 우리나라 무용 역사에 보기 드문 무용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무용계의 대부로 남았다는 전제하에 여러 번 인터뷰를  요청하였지만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무용월간지와 춤지 및 다른 인터뷰 기사를 토대로 원고를 완성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송범의 무용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발레로 시작해 발레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력과 이후에도 현대무용을 거쳐 한국무용으로 넘어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편재되지 않은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줬으며 우리나라 극무용의 대가로서 자리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또한 한국무용협회를 만들어 오랜 기간 이사장직을 역임한 것도 알고 있다. 무용계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춤 전문잡지에 기고된 무용평론가 김경옥의 송범에 대한 평가는 '겸허와 성실로 이룩한 왕좌'라 불리기도 했으며 특히나 그의 성실하고 진지한 생활태도를 한치의 변함이 없다고 극찬할 정도이었다. 춤을 종교처럼 알았던 무용가가 비단 송범만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인 '한국 무용계의 대부', '무용극의 창시자' 같은 수식어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은 아니다. 특히나 한국적 소재를 토대로 서양 극장 예술의 꽃인 발레 형식을 차용하여 만든 송범의 대표작 <도미부인>의 예술적 위상과 브랜드 가치는 국립무용단의 대표작을 넘어 한국 현대 무용사의 명작으로 자리매김 하기에 충분하다고 무용평론가 성기숙은 말했고 무용평론가 문애령도 송범과 대면 인터뷰를 통해 글을 기고했을 때 '송범의 일대기는 우리 무용사 그 자체'임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현대 무용의 정신, 한국적 신무용의 창작, 발레의 도입 등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체험으로 받아들인 그였기에 주어진 환경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그 안에서 집념을 관철시킨 삶이었으며 본인이 자주 쓰던 표현처럼 " 그 양반은 머리가 좋다"라는 묘사를 즐겨하던 그에게 그 표현을 다시 되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영리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였다. 전무후무한 무용가 송범, 그는 지금처럼 정확히 춤이 나누어지지 않던 시절에 편견 없이 다양한 춤을 배웠기 때문에 무대에서 장르를 초월한 무용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다시 태어나도 춤을 출 것 같던 그는 자식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2005년 캐나다로 이민 간 뒤 애석하게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노환으로 타국에서 2007년 6월 15일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국예술사업서 ⅳ1985년판. 대한민국 예술원 한국 연극, 무용, 영화사. 안제승

신무용사. 국립극장 30년. 국립극장. 안제승

한국 현대 무용사의 인물들. 문애령. 눈빛.

우리 무용 100년. 김경애. 김채현. 이종호. 현암사

한국 무대무용의 선구자 송범.서연호. 월인출판

문화유산 채널. 성기숙. 송범의 춤 인생. 황무지에서 일군 춤의 편력과 성취.

송범 춤 여정에 나타난 예술적 성향과 무용사적 의의.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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