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성남의 본명은 임영규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 ‘성남’을 공연장에서 우연히 쓰게 된 것이 예명이 되었다. 아홉 형제 중 네 번째로 위로 딸만 셋이 있는 장남으로 전주사범학교를 다니던 임성남의 포부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고위 공직자이던 아버지가 지방으로 전근을 가시면서 전주사범을 다녔던 임성남은 해방 직후, 집에 우연히 들어온 피아노를 때문에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지만 당시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에 관심 있는 것을 탐탁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날 아버지에게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아들을 때리기도 하였고 훗날 몰래 피아노를 집에서 없애기로 하다가 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좋아하는 곡 한 번을 치게 하고 피아노를 바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좋아하던 피아노 연주도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서 음악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자 하던 소년의 꿈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발레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서울발레단에서의 활동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되자 그는 헛헛한 그리움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백조의 죽음> 이라는 프랑스 영화 한 편을 보고 발레계의 입문을 꿈꾸게 되었다. 이 영화 한 편을 관람한 뒤 발레라는 장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의 나이 16세에 발레계에 입문하고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음악가가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발레를 배우고자 결심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한동인 발레단에 찾아가 문을 두드린 일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무용할 때 입고 연습할 연습복과 타이즈도 없어서 남대문시장에 가서 미군 내복을 사서 검정 염색을 해서 입어야 했고 녹음기도 없어서 유성기로 연습할 정도로 환경은 열악했다. 연습용 음악 반주는 유성기를 사용해야 했는데 매번 바늘을 갈아 끼우고 손으로 일일이 태엽을 감으면서 음악을 트는 기계로 연습을 해야 했고 게다가 연습실로 사용하던 비좁은 2층 집은 동작을 하며 뛸 때마다 삐그덕 거려서 힘들 정도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발레마스터의 제대로 된 이론적인 설명 없이 동작을 눈치껏 따라 해야 하는 불편함이 당시 그의 마음엔 큰 불만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다 1950년 6.25가 일어나기 전날인 6월 24일 서울발레단은 안데르센의 동화를 발레화한 <인어공주> 공연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임성남은 솔로(solo)와 파드되(pas de deux)를 추어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다음날 공연 중에 헌병들이 들어와 공연을 중단시켰는데 이 날 대부분의 서울 발레단 단원들이 납북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인천 누이집에 있던 덕분에 납북되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한동인의 주먹구구식으로 수업과 다소 여성스러웠던 수업 스타일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예술계통의 일을 하는 아들을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불화가 그의 마음을 가장 많이 아프게 했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범학교 부속 음악담당교사로 부임했지만 3개월이 다 되어갈 즈음 결국 사표를 내고 발레를 배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의 거센 반대와 모진 매질도 그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고 옷 몇 벌 챙겨서 나온 게 전부인 그가 바로 향한 곳은 서울발레단이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한 6개월 동안 발레를 시작한 그 시점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납북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가족을 다시 만난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현해탄을 넘어가 발레를 배우게 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핫도리 시마다 발레연구소 입소
일본에서정통 발레 <레 실피드>를관람 후 그는 러시아 정통 발레를 배운 일본인 핫또리 시마다 (服部鳥田) 선생에게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남편은 한국인 백성규(일본명 시마다 히로시)이었는데 한국의 연희전문 출신으로 연극을 전공했지만 그는 우연히 학교에서 열린 무용 강습회에 참여했다가 육상 선수 이어서 체격 조건이 좋고 배우답게 표현력이 돋보였기 때문에 강습회를 주최한 선배는 그를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발레 교습소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 출신인 엘리아나 파블로바는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중간 기착지였던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러시아 발레를 배울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일본 발레계의 대부이었던 그는 한국인이었지만 일본 패망 직후인 1946년에 그가 기획하고 출연한 <백조의 호수>는 일본 발레사 최초의 전막 공연으로 기록되기도 했었다.
가마쿠라 발레 연구소에서 만난 핫도리 지에코(服部智惠子)와 결혼해 당시 일본 발레계의 핵심적인 인물들에게 임성남은 러시아 정통 발레를 사사한 덕분에 임성남은 일본 도쿄 청년 발레단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굶주림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밥을 굶기도 예삿일이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택시운전을 하기도 하였고 시간 날 때마다 발레 레슨을 해야만 했는데 굶주림의 고통도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건 연습에 몰두하던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그는 1953년 일본 청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후 1954년 한국 발레를 위해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첫 활동
1954년 5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울 남산에 임성남 발레연구소를 개소하였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발레를 포기할 순 없었고 그는 무엇보다 공연 비용 때문에 마음고생이 더 심하던 시절에 학원생의 부모님께서 공연비용을 협찬을 받기로 하였다가 공연을 열흘 정도 앞두고 찾아갔지만 사정이 생겨서 후원이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연구소로 돌아와 연습실 거울을 깨서 그의 오른쪽 손목의 동맥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훗날 이 내용을 알게 된 당시 시공관 백순성 관장이 비용 일체를 후불로 내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예정대로 공연은 올려질 수 있었지만 그는 오른손이 불구인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해야 할 만큼 모든 게 열악하고 힘든 그런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중 1957년 그가 올린 <백조의 호수(2막)> 공연을 올렸고 1956년 임성남 발레단 창단후 1961년 서울발레단으로 단체 명칭을 개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