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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Sep 18. 2016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무용가 조택원(2)

  귀국 후 활동 


  “남성적인 발랄함이 아니라 가냘픈 선의 여성적 부드러움이 오히려 특징”이라고 했던 무용 평론가 안제승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 풀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유연미는 비단 외형적 형식만이 아닌 내면화된 정신세계에서도 같은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특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정막 밑에서 약 4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온 조택원은 귀국하여 서울에 처음으로 무용연구소를 차린 것은 1932년 9월 25일 현재의 충정로 2가 자리 모 악기점 2층 자리에서의 홀이었다. 연구소를 차리자 처음 하루 이틀에는 문하생이 모이는 듯했으나 당시만 해도 조택원이 남자이어서 여류무용가에 비해 매사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2년 동안을 발표할 기회도 없을 정도로 안타깝게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후 1932년 서울로 귀경한 조택원은 일단 2년제 전문학교인 중앙 보육학교(현 중앙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무용을 가르치다가 그만두고 방락정(邦樂庭)에 연구소를 개설, 운영하며 발표회 준비에 몰두했다. 

 1934년 1월 27일 경성 공회당에서 가진 제1회 조택원 무용 발표회를 갖게 되는데 당시 공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 부= <아루레키노와코름방>, <소야곡>

<스페인 소야곡>, <우울>,<화려한 원무곡> 

제2 부= <검은 소녀는 탄식한다>, <작열하는 사색>

<땅에 바친다>, <황혼>, <죽음의 유혹> 

제3 부= <애수의 인도>, <어떤 움직임의 유혹>

<어린이의 페이지>,<학의 행렬>, 

<달팽이와 비>, <장화를 신은 고양이>, <사랑의 슬픔과 기쁨>


 

  조택원의 귀국 후 첫 공연은 이렇듯 성공적인 것이 못되었다. 우선 상대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석정영자에게 부탁을 해 춤을 춘 형식이었고 연구소 역시  실제적으로는 석정막의 무용연구소 한국 지소라고 이름을 걸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한 해를 걸러 1935년 조택원은 제2회 발표회를 갖는다. 새로 건립된 부민관(府民館)이 공연장소가 됨으로써 무대 효과가 현대 조명에 힘입어 한층 돋보인 공연이었다고 전한다. 이때 공연 작품은 <에스 파노라>, <흑인의 노래>, <백일에 춤춘다>, <사랑의 기쁨>, <잃어버린 넋> , <시바에 바친다> , <승무의 인상>, <원무곡>, <월광>, <우울>, <봄은 온다>, <만종>등이다. 

 여기서 조택원의 기념비적인 작품 몇 가지가 선을 보였는데 농민 묘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19세기 사실주의 화단의 거두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의 무용화한 작품 <만종>과 전래하는 승무에 나름의 시상 성을 주입하여 새로운 해석의 현대판 승무를 창조하려 했던 작품이 <승무의 인상>을 들 수 있다. 

 그림 <만종>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땅에서 태어나 땅과 더불어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한 쌍의 농부가 황혼에 붉게 물들어 버린 석양을 배경으로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에 접하고 삶의 고귀함과 창조의 심오함을 접하기 마련이다. 마치 환상 속에 움직이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펼쳐지는 이 작품에서 자연을 사랑하다 못해 그 자연 속으로 귀의해 가려는 조택원의 낭만과 이상에 공감하며 박수의 갈채를 보냈고 이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조택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두 차례의 공연을 결산해 보면서 조택원은 외유(外遊)를 결심하고 해외로의 진출을 꾀하고 활동의 터전을 넓혀 보겠다는 야심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 새로운 철학을 갈구하고자 하는 자기 수련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게 된다. 



발레의 입문


그는 1938년 11월 6일 일본으로 입국 후  발레에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의 춤은 의지의 춤, 체력의 춤, 물리학의 춤, 과학의 춤이라고 밖에 규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서양의 춤은 결국 하나의 ‘메커니즘’이요, 또 서양의 무용가는 하나의 기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거기에 비기면 우리의 춤은 시초부터 흥이 나지 않으면 못 추는 춤, 즉 감각의 춤, 정서의 춤, 피와 살의 춤, 혼의 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감정의 춤이요, 사상의 춤이자, 철학의 춤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동․서양의 차이란 이처럼 예술의 조그만 한 갈래인 무용에서도 뚜렷하고 엄청남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엄청난 거리의 저쪽에 놓여 있는 서양의 무용, 발레가 내게는 차차 거의 미칠 수 없는 물건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라고 회고하였다. 이것은 배구자와 최승희 조택원을 포함한 당시 활동하던 무용가들이라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시작은 서양무용에서부터 하였지만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분명 이 세 사람 모두에게는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귀국 후 일본 내 10여 도시에서의 공연을 마친 조택원은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 주최로 1939년 5월 8~10일 부민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출국할 때의 고별공연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조택원 무용의 변화는 그런 동질량의 반복 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작도 같았고 전개나 과정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춤사위를 삭이고 어르는 마음, 멋을 쫓고 흥을 부르는 감정의 자세가 분명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택원은 프랑스에서의 도불(渡佛) 후 그 수많은 유럽의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을 익히 보고 나서 오히려 더 진정한 민족 예술가가 되어 돌아왔다.   당시의 비평에서도 보면




  “얼른 보기에는 유럽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서 흥겹게, 순수하게, 맑고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그 신비롭고, 미묘하고, 비길 데 없이 동양적인 멋, 저 반도의 가을 하늘처럼, 그들의 새하얀 옷처럼, 밝고 신선한 감각이 그 하나하나의 동작에서, 하나하나의 표정에서 여지없이 느껴진다.   



고 하였지만 그러나 장본인인 조택원은 오히려 그런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 최초 창작발레 <학>의 실패 요인   


  유럽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던 것인지 아니면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영향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조택원은 비로소 일본 공연 후 귀국 도중 가지 마마로(鹿鳥丸) 선상에서 구상해 둔 작품 한국형 창작발레 <학> 제작에 착수했다. 무라가미 도모요시(村上知義)가 연출을 맡고, 다가기 도오로꾸(高木東六)가 작곡을, 이또 기사꾸(伊藤熹朔)가 장치를, 그리고 김정환이 의상을 담당하는 등, 당대 제일의 거목들을 동원하여 만 1년의 제작기간과 3만 원이란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거액을 투자해서 이룩한 이 필생의 야심작은, 1941년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히비야 공회당(日比谷 公會堂)에서 막을 열게 된다. 

 아마도 그의 생각으로는 학의 생태를 주시하고 이를 리얼하게 묘사해 가면서 그 속에 담긴 동양의 정서와 철학을 작가의 의지대로 표현하고자 뜻 아래 60여 명의 무용수를 동원해 가며 대작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당시의 평은 혼신의 정력을 쏟은 보람도 없이 일본 매스컴의 반응은 너무나 냉담했다.  

  이를테면 “짜임새가 없고…, 산만하고…, 시간이 너무 허비된 것 같고…, 많은 무용수들이 통제되지 않고…” 하는 식이라는 평만 난무했다. 어쩌면 이는 작품 <학>이 갖는 근원적인 허점은 플롯 설정 자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무용학자 안제승은 어미 학이 새끼를 낳아 보살피고 가르치고 사랑하는 동안에 어느새 성학(成鶴)으로 성장한 새끼 학이 어버이 학과 더불어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린다는 내용도 그러했고 또한 극적인 특별한 갈등도, 복선(伏線)의 기복도, 허구도 마련되지 않은 담담한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춘하추동 4계절로 나눈 60분 전 4막짜리 발레로 구성하려 했으니 무료하기보다 차라리 염증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 된 것이라는 평이 아마도 주효했다고 평했다.   

 “차라리 어떤 낭만적 시인이 쓴 서사시(敍事詩)였다면 다양한 어휘와 유려(流麗)한 묘사에 힘입어 독자의 흥미를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겠지만 발레극의 특성상 그 특성을 살리지도 못하였으니 이미 전원시(田園詩)가 아니라 희화(戱畵)에 불과하게 되었으니 이 작품이 실패로 끝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원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택원 그 나름대로의 말을 들어보면 정재풍(呈才風)의 의상이 주는 제약 때문에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거동 언어(擧動言語)로서의 구실은커녕 불협화음(不協和音)만 나타낼 수밖에 없는 무대가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럴 만큼 어쩌면 21세기의 현재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해도 성공하기 힘든 작품인 것은 분명하였지만 결론적으로 한국 발레사에 있어 최초로 만들어진 한국적 창작발레의 실패의 주된 원인은 안무와 상황 설정과 복선 처리 등과 같은 구성상의 허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악․의상․장치 등의 이른바 보조 표현 수단의 소홀과 작품 자체에 맹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 만든 무용조곡 <춘향전>의 경우는 한국 신무용사에 있어서 최초의 장편 스토리 무용으로서의 인정을 받게 된다. 조선민요를 반주곡으로 사용한 이 작품은 작품의 줄거리와 전개과정이 획기적이었고 조택원 다운 춤의 색깔이 입혀져 더욱 빛이 났다. 

  1942년 4월 조택원은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거액을 들여 만든<부여회상곡>을 부민관에서 6회 서울과 대구에서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식민지 정책에 부합하는 내용의 작품으로 내선일체( 內鮮一體)를 강조하였고 이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국,  만주, 몽고 등 국내외에서 1천 회 이상을 공연을 함으로써 훗날 이 일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무용가들에게 친일적 행위로 몰아붙여져 그의 일생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되어 결국 1945년에는 조택원 스스로 친일 행위를 한 부분을 인정,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의 조택원은 미국과 소련에 주목을 받았던 무용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계기로 미소공동위원회 행사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택원은 당시의 혼미한 국내 정세를 이유로 1947년 10월에 도미하였고 미국 내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49년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독선적인 정치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1960년까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지내게 되었고 그렇게 외국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국춤과 자신의 창작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된 셈이었다고 미국의 유수의 무용가들에게 한국무용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1956년 도일하여 1957년 은퇴 겸 고별공연을 일본에서 갖은 뒤엔 프랑스에 있다가 결국 1960년 4.19로 민주정부가 세워진 뒤에야 한국에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엔 주로 한국무용과 관련된 일들을 하였고 1969년에는 한국무용단을 창단하여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일보 이사가 되는 등의 춤과 관련된 일들보다는 무용 행정과 진흥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1956년 도일하여 1957년 은퇴 겸 고별공연을 일본에서 갖은 뒤엔 프랑스에 있다가 결국 1960년 4.19로 민주정부가 세워진 뒤에야 한국에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엔 주로 한국무용과 관련된 일들을 하였고 1969년에는 한국무용단을 창단하여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일보 이사가 되는 등의 춤과 관련된 일들보다는 무용 행정과 진흥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조택원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 무용계의 선구자이다. 한국 발레사에 있어서 그의 업적은 그가 창작발레 <학>을 만들었고,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해서 발레 공연한 사실은 우리 발레사에 길이 남을 업적 중에 하나이기도 하였으며 무용의 철학화에 앞서있었던 남성 무용수이었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것이 일제 치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일본인들의 도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작품의  질 또한 예술작품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조택원은 술회하고 있지만 그의 시도하고자 한 그 업적만은 후세에 한국 발레사와 한국 무용사의 양갈래 길에 있어서도 확연히  길이 남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경력상으로는 현대무용으로 시작해서 한국무용가로 그 뿌리를 내렸지만 그 이유인 즉, 한국적 무용을 하라고 충고했던 스승 이시이 바꾸의 가르침과 이승만 정권을 비방한 이유로 추방당해서 망명시절에 얻은 깨달음 인지도 모른다. 이후 예술가는 세상을 떠났고 그 예술은 이렇게 남아있다. 아마도 조택원 그 자신은 한국의 무용사에 있어 혹 한국무용가로 남겨지길 원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는 떠났고 그의 글은 남아서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다.  




“나는 어째 조선 무용을 추는가? 서양에 한번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서양 것을 배우고 또 그들보다 낫게 되려고 애쓰나 과연 일조 일대(一朝一代)에 이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자연 우리는 자기의 전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중략) 자기 전통의 것은 이미 거의 피 속에 그 요소가 있으므로 제가 왜 조선무용에 중점을 두는지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어느 예술가가 자신의 춤에 자신의 향이 남기를 거부할 것인가?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꾸의 제자로 현대무용계에 입문, 조택원 역시 발레 기초를 다져 연습해 온 최승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를 지니고 있다. 도불(渡佛)과 순회공연을 하면서 느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자신의 예술가적 길로 한국무용을 택한 것이다. 이렇듯 그의 흔적을 돌이켜보면 그는 한국의 신무용사와 한국 발레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가임은 분명하다. 



조택원의 말년 


  조택원은 최승희 더불어 당대를 활약한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무용가이었다. 활발한 활동 뒤 광복 뒤에는 친일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문제가 있어서 한국에 입국조차 못하는 떠돌이 시절을 지나 박정희 정권 때가 돼서야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긴 유랑생활 끝에 만난 무용가 김문숙과 재혼했고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1976년 69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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