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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Sep 18. 2016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무용가 조택원(1)

조택원 (趙澤元) : 1907~1976

출생 


  조택원은 1907년 5월 22일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아버지 조정완 어머니 김금오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상당히 유서 깊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함흥 군수 지낸 할아버지 조병교의 가르침을 편모슬하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무용에 입문한 계기 


  그가 무용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920년경 러시아 해삼위 학생 예술단(블라디보스토크 교포 예술단)의 단원인 시몬 박(朴)을 먼 누이 뻘 되는 서복 동의 소개로 만나게 되면서부터 라고 전해진다. 시몬 박으로부터 코 팍 춤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됐다면 계기가 된 셈인데  아마도 1920년대 초반부터 코 팍, 체체 카, 트레파크 등의 민속무용을 배운 바도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삼아 춤 솜씨를 보였던 모양이다. 1924년 1월의 극단 토월회(土月會) 3차 공연 때는 <사랑과 죽음>(박승희 작)에서 ‘춤추는 학생’ 역으로 ‘코팍’을 추어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도 있었을 정도이었다. 하지만 코팍춤의 경우엔 그것은 그저 취미에 불과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1920년대의 청년 조택원은 휘문고보(현 휘문고) 재학 시절 테니스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졸업 후에는 조선 상업은행에 영업부에 취직하여 창구에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시대적으로 봤을 땐 남들이 못 들어가서 안달인 그 탄탄한 직장도 평범치 않은 그가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해서 원하지도 않은 평범한 은행원 생활로 만족하고 지내기엔 그의 청춘이 너무 젊었고 그에 영감은 늘 시적으로 충만했다고 한다. 그런 조택원에게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사적 무용세계의 입문의 시기는  1927년 10월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바꾸(石正漠)의 공연을 보고 그의 제자가 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일본유학 


  조택원은 당시 석정막의 공연에서 현대무용 작품 <수인>을 보고 무용계의 입문을 결심하게 되는데 물론 그의 문하생 중에는 한국인 제자로 최승희도 있었지만 조택원의 도일(渡日)은 최승희 보다 약간 뒤늦은 1928년 봄에 이루어졌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조택원은 춤은 서서히 매료되고 있었고 당시 신흥 예술로 축복받은 석정막 일행의 공연을 보자마자 조택원은 과감히 일 년도 채 안 다닌 은행 창구에 사표를 내던지고 현해탄을 건너 석정막의 문하에 들어가 그 문하생이 되기로 자처하게 된다.

 석정막의 제자가 되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그는 선택의 여지없이 석정막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식 제자 (內弟子) 개념으로 숙식을 물론 그 집에서 해결해야 했고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연구소 입소 석 달이 되도록 그가 한 일은 집안 마루만 닦아야 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마루만 닦던 그에게 어느 날 석정막의 부인은 조택원을 불러 “당신은 무용가로서 소질이 없어 보이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택원은 아무 말 없이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여전히 마루를 닦으며 지냈다. 

 그러는 동안 또 3개월이 흐르자 석정막의 부인은 또 조택원을 불러 ”남편도 당신이 소질이 없으니 하루속히 귀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디다." 라고 말하자 마침내 조택원은 그동안 묵혀왔던 설움에 복받치는 울분을 갖고 석정 막의 부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무어요? 내가 무용에 천분(天分)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시험해보지도 못하고 어찌 지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정히 제자로서 집안에 두지 못한다면 따로 내가 직업을 찾아 내 밥벌이를 해결하고 밤에만 와서 선생에게 배우겠소. 그것마저 불허한다면 달리 스승을 찾아야죠!. 하고 야무지게 말하는 조택원의 결심을 알게 된 석정막의 부인은 그 말을 그대로 남편에게 전하자 그때서야 석정막은 미남에다가 멋쟁이인 그가 단순한 생각으로 집을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다음날부터 피나게 그를 지도하여 약 1년 뒤에는 한국에서의 고국공연에 조택원 역시 석정막의 문하생으로 당당하게 고국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위의 일화처럼 당시에는 일본으로 가서 무용을 공부하는 이들 대부분이 이렇게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집안일을 거드는 등 일본식의 제자 개념으로 춤을 배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조택원이 무용가가 되려고 하기까지는 남성이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는 사회적 이목이라든가, 주변의 만류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일본행을 결심을 다지기까지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적, 개인적 환경을 놓고 봤을 때는 여자가 춤을 추는 건 기생밖에 없던 시절에 게다가 유복한 집안의 장남이 탄탄대로를 걷다가 다 관두고 춤을 배우러 현해탄을 건너가려는 결심을 한다는 건 결코 현재로도 그렇겠지만 미래를 놓고 봤을 때 역시 쉬운 일만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1927년 10월 이시이 바꾼 제2차 경성 공연이 공회당(公會堂)에서 열리고 조택원 보다 한 발 앞서 떠났던 일본으로 떠났던 최승희가 <금붕어>,<백귀야행, 百鬼夜行>,<그로테스크>, <식욕을 돋우다>,<아름다운 푸른 다늄>등에 출연하는가 하면 <세레나데, 小夜曲>에서 독무(獨舞)까지 추는 모습을 보자 조택원의 젊은 피는 끓었고 이를 두고 그는 자서전에서  




“그날 밤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해 온 내 인생의 목적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갈 길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했다.”  



이렇게 밝히고 무용에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 후 1년 뒤 조택원은 자신을 첫 작품을 1929년 방락정(邦樂庭)에서 가진 이시이 바꾼 무용공연 중 <어떤 움직임의 매혹>으로 출연하였다. 당시 그 무용에 대한 안무자의 의견을 이렇게  말하였다.  



“체조에 사용하는 곤봉에서 힌트를 얻었고 동작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다. 팔의 동작에 끌려 몸 전체의 동작이 전개되어 나가는 이 춤의 바탕이었다. 요컨대 정구 연습으로 얻은 고도의 날카로운 운동 신경의 도움을 크게 받았고 섬세하고 민첩한 동작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춤이나, 자신 있고 비교적 힘이 안 드는 춤이었다.”





 이렇듯 자화자찬 (自畵自評) 식의 평을 했지만, ‘힘 안 드는 무용’, ‘매끄러운 무용’은 비단 이 작품에 국한될 것이 아니고 어쩌면 조택원 무용 일생을 두고 봤을 때 그가 간직한 일종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성격의 한 단면이었다고 풀이해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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