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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Sep 07. 2019

근대춤의 총아 배구자 (2)

홍순언과의 결혼


  그런 이유로 이사도라 던칸과 안나 파블로바의 실험성 강한 현대춤을 보고 우리 고유의 전통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배구자는 2년 동안의 공백 기간을 갖았고 안나 파블로바를 만난 영향으로 1928년 4월에 미국 유학을 앞둔 고별공연인 음악 무용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 일은 여권 문제로 여의치 않아 무산되고 말았고 따라서 배구자는 이듬해 평양에서 덴카쓰로부터 탈출할 때 자기를 호텔방에 숨겨주었던 지배인 홍순언과 결혼하게 된 계기가 된다. 평북 의주 출신의 홍순언은 열차 보이로부터 출발해서 평양철도 호텔 지배인이 된 근실한 청년으로 평범한 집 규수와의 결혼이 아닌 콧대 높은 당대의 스타인 배구자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함이 많았지만 덴카쓰를 탈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특별한 인연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서 결혼을 했다고 전해진다.




공연계 복귀


  1928년 4월 20일 장곡 천정 공회당에서 올려진 배구자 고별 무도회에서 이 공연에서는 일반적인 무용공연만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서양의 음악이 한국인과 외국인의 협연에 의해진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의 공연평은 다음과 같다.



“배구자 양 독연 순서: 백색 미사 주최로 오는 21일 오후 7시 반부터 시내 장곡 천정 공회당에서 열리는 배구자 양의 음악 무용회 그 날짜가 절박하여 짐에 따라서 내야의 연습은 더욱 맹렬하고 주최 측의 여러 가지 준비는 차차 진행된다는데 특히 반주로 나오는 스트테니씨는 이번에 일본에 가게 되어 이번의 반주는 배양과 더불어 작품 기념 출연이 될 터이니 그의 독특한 신비의 피아노 소리는 더욱 이채를 띄우리라.”  



라고 하였다. 당시 경성 공회당 무대에서 발표회를 갖은 배구자는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알토 독창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아리랑>이란 작품에서는 직접 안무 출연하여 무대에 올린 사실로 보아  현재의 공연과 다른 점이 있었고 여기에서 살펴보면 위의 작품들 중에서 몇 개의 작품은 서양무용의 소개와 한국 창작무용을 선보인 것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휴즈와 안병소 등을 통해선 악극 형식으로 자신의 노래를 부른 듯하다. 작품 우리 민요를 형상화한 창작 신무용 <아리랑>에서의 배구자는 아름다운 산골 아가씨 역을 잘 소화하여 한국적 정서와 섬세한 표현으로 당대에 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였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특히나 이 공연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시대적으로 유명했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na:1882~1931)의 대표작인<빈사의 백조>를 무대에 올렸다는 것은 한국 발레사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당시 이 공연을 본 동양극장의 전속작가 겸 연출가인 박진(朴珍)은 토슈즈를 신고 무용한 배구자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무대 뒤에 가서 그가 신은 이상한 신을 자세히 보았다. 코가 길고 딱딱한 것인데 그때는 참 배구자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라고 평가했다.



  이 공연에서는 혼합된 장르의 공연의 성향과 토슈즈를 가지고 묘기를 보일 만큼의 배구자의 행동의 진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 당시 배구자는 순수한 무용가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예술성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는 작품들이 모두 무대 형식에 맞게 만든 것이라든지 이제까지의 생활형의 민속무용을 무대화하기 위하여 극적인 행동 성과 흥겨운 안면 표정을 가미하고 장치를 세우고 분홍신(토슈즈)을 신고 춤을 춰서 좋은 흥행 효과를 올린 점은 레뷔에 그칠 수밖에 없게 본 시각이 대부분이었던 것처럼 통속적인 것이었다. 그런 배구자 에게 당시 취재를 간 매일신보 기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무용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조명이 찬란한 무대 위에서 만인의 칭찬을 받는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환락의 세계 속에서 또한 구슬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 같은 세계 속에서 세상의 공허한 사랑만 받는 즐거움을 삼고 있다가는 나의 최후도 어찌 될지 모르고 더욱 기예를 끝까지 배우려면 한이 없는 것 일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참된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하여 보자는 것이 이번 일행을 떠난 동기” 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결혼을 한 직후 배구자는 구미에서 이 땅의 무용을 소개하는 동시에 전통무용을 개량하기 위해 서울 신당리 문화촌(新塘里文化村)(현 서울 신당동)에다가  1929년 7월에 서구의 무용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의 전통무용을 개량하기 위해서 배구자무용연구소를 국내 최초로 개설하여 연구생에게 무용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연구소는 연구생 선발 당시 숙식을 제공하고 내규도 까다롭게 만들어 철저하고 엄격한 교육을 행했고 내부적으로는 권번 출신이라든가 흥행 극단 출신의 무용은 배제하고 나름대로 좋은 집안의 출신을 내세웠고 15~20살의 12명의 남녀를 시작으로 이내 50여 명으로 늘어나는 활 발성을 가짐으로써 예술무용으로서의 승화를 첫 시도하였던 것 같다. 이후 무용연구소를 예술연구소로 바꾸고 무용 외에도 노래, 음악, 가무극, 익살극 등의 레퍼토리를 개발하여 단원을 양성하였다.  

 그로 인해 연구생도 늘어서 3개월 정도 후에 우리나라 최초로 영락정 중앙관에서 1929년 9월 29일 경성 공회당에서 제 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는데 이 행사가 바로 우리 신무용의 최초의 정식 공연이었고 무용평론가 강이문(姜理文)은 이 공연을 한국 신무용사 (韓國新舞踊史)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 공연은 무용의 종류도 발레적인 것(백조의 사), 율동적인 것(셀라), 일본 민속무용, 한국무용(아리랑) 등 다채로운 내용이었다고 하고  이 공연의 성공으로 일본과 매니지먼트 전속계약을 맺고 1931~1934년까지 주로 일본을 기점으로 공연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동양극장 설립


 이런 배구자의 뒤에는 남편 홍순언이 있었고 이들 부부는 일본에서의 흥행 성공으로 귀국 후, 1935년 10월 31일 아내 배구자를 위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1가에 당시 돈 19만 5천 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長) 설립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홍순언은 소설책 하나 변변히 읽어본 적이 없고 극장 문 턱 에도 가 본 적이 없던 앞서 말한 대로 호텔보이 출신의 남자였지만 아내가 되었던 배구자와의 만남을 통해 한국 연극사에 길이 빛날 연극을 위한 전용극장을 아내 배구자를 위한 전용무대를 만든다는 일념 하나로 야전침대 하나 갖다 놓고 감독을 하다시피 하며 근 1여 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극장이 바로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을 만들었다는 히스토리가 있다.

 이 극장에 대하여 당시 신문을 참조하면 객석 648석의 회전무대에 호리젼트(천공막)까지 갖춘 이 극장은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 전용 극장이었고 연극사 사상 최초로 단원들 월급제로 운영되었고 동양극장은 당시 연극인들의 많은 염원으로 숙원을 풀게 되었고 연극 전용극장임을 표방하고 연중무휴의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관 이후에 동양극장은 자체적으로 전속 연극단을 여러 개 두고 관객 확대를 도모하였고 배구자는 그 안에서 배구자 악극단을 만들어 주축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11월 1일부터 진행된 개관 프로의 내용으로는 배구자 악극단의 만극(漫劇), 촌극, 무용극 그리고 소녀 관현악단의 연주, 무용, 독창, 뮤직 플레이 등을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엔 때 마침 신무용이 근대 춤으로 양식으로 부각받고 있었고 그런 시대적 흐름에 배구자와 홍순언 에게는 간과되는 사항은 아니었기 때문에 동양극장의 탄생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 배구자를 위해 지어진 극장, 하지만 그 극장의 탄생과 흥망성쇠를 보는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유인 즉, 1938년에 설립자 홍순언이 갑작스레 요절하는 관계로  극장도 3년 만에 운영상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설가 최독견을 지배인으로 동양극장은 박진, 홍해성, 이운방 등을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최독견은 동양극장을 스스로 운영하게 되었고 친인척 간이었던 홍순언의 직계가족과 배구자 가족 생활비까지 떠맡게 되었을 정도로 운영상의 문제와 경영자의 예술에의 무지와 대중의 낮은 수준과 상업적 곤란을 상업극을 올리는데 만 치중한 결과로 인해 동양극장은 1939년 8월 24일 날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근대 무용 역사에 보여준 배구자의 무용 활동에 관한 모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무용가 배구자에 대한 당대의 평가



이제부터는 배구자의 평가 및 해석에 관한 내용을 다뤄보고자 한다. 당시의 배구자의 생각에 가장 근접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공연 소감을 밝힌 기사로 그 내용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처음 생각하기를 조선이라는 곳에는 전혀 무용이라는 것이 없는 줄로 알았어요. 그렇지만 실지로 발을 벗고 일을 하여 보니까 무용이 없기는 고사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벌써 어느 나라에게든지 지지 않을 만한 훌륭한 무용을 추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용은 왜 찬란하게 빛이 나지를 못합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의 훌륭한 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밤낮 남의 나라 춤만 숭상하여 그것을 배우지 못하여 애를 씁니까? 그야말로 보배를 썩히는 일이 아니에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나 파블로바 여사의 춤이 아무리 유명한 것이라 해도 결국 그것은 그들의 춤이요 우리의 춤이 되지 못하니까, 그것을 숭상할 필요도 없거니와 숭상해도 우리의 짧은 컴퍼스와 삐뚤어진 관절로는 암만해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는 일이므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한 춤을 연구해서 조선에 확고한 무용도를 수립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입니다. 그래서 나는 금년부터 특히 우리의 자랑인 조선 민요를 무용화하여 가무극 같은 데도 손을 대어 볼까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될는지요, 황무지 같은 곳에서 예술의 꽃동산을 꾸며 보겠다는 우리의 고충도 좀 살펴주셔요…….”  


 

  매일신보에 밝힌 자신의 무용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일찍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예술가로서의 양심 어린 고백은 다소 신선한 편이었고 서양춤을 구사하는 사람으로서는 다른 어느 예술가보다 자신의 맹점을 잘 알고 있는 예술가였다는 것을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배구자의 조선 춤에 대한 의지와 신무용에 대한 열정은 당시 시민들에게 혁신적인 인기를 얻기 힘들었던것 같다.



배구자의 말년


  배구자는 1937년 남편 홍순언이 사망하자 남편상을 치루기 1년도 채 되기전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어 급하게 재혼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동양극장의 경영권 문제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악극단도 해체 되었으며 외부 활동을 일체 전면 중단하게 되었고  1950년대 일본계 미군과 다시 또 다시 재혼해서 미국으로 가서  2003년 4월 11일 98세의 나이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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