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자(裵龜子) : 1905-2003
출생과 이력
1905년 대전 출생으로 출생에 관한 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으며 유년시절의 행적조차 투명하진 않다. 그렇기에 배구자를 알려면 그보다 앞서 고모이자 양모이었던 친일파 배정자(裵貞子)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배정자의 본가는 경남 김해의 어느 집안의 딸이었으나 어릴 적 부친이 국고에 낼 세금이나 곡식을 모두 다 써버리는 범포(犯逋)해 그 집안 남자들은 모조리 사형을 당하고 배정자만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관비로 지내다 당시 군사의 눈에 천성이 영리함이 눈에 띄어 일본관(日本館) 아이를 보는 계집을 보모를 구하자 아이 보는 계집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배정자는 처음과는 달리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3년 뒤에는 일본인 통역관이 되었고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살아난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양녀까지 되어 어느 정도의 자신의 삶이 안정이 되자 자연스럽게 친정의 안위를 염려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의 사촌 오라버니인 배석태 형제를 선친 양자로 들어 앉혔고 배석태의 딸로 태어난 여자아이인 배구자를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게 되었고 즉, 고모이자 양어머니 격인 배정자는 예쁘장하고 영리한 배구자를 어떻게든 출세시켜볼려고 했다고 한다.
덴카쓰 입단과 퇴단
1915년 공진회 주최의 제1회 조선박람회 때 내한한 일본 연예계에서 유명한 송구제천승곡마술단(松訄濟天勝曲馬術團)이 내한했을 때 입단시켰다고 한다. 그때 배구자의 나이가 8살이었다. 위의 내용으로 봐도 실질적으로 세계적인 흥행단체인 덴카쓰 곡예단 (天勝曲藝團)에 입단하기까지의 과정에서는 고모이었던 배정자의 영향력이 제일 컸음은 분명한 사실로 여겨진다. 마쯔아카라사가 덴가쯔(天勝曲藝團)이라 함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곡예단으로서 무용․음악․곡예․연극 등을 하는 예술단체로 알려진 단체다. 그러나 이 단체는 정통 예술단체라기보다 춤과 노래 곡예 촌극 등을 다루는 단체로 다양한 레퍼토리와 뛰어난 기량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배구자 역시 이 단체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그다지 큰 불만도 없었고 공연단의 일정에 맞춰가는 일본행도 선뜻 응했던 모양이다.
이에 관해 배구자의 막냇동생인 무용가 배한라는 이토 히로부미와 상의하에 덴가쯔로 보낸 고모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얘기했다. "왜 굳이 덴카쓰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것은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었던 까닭에 - 아마 정치적으로 귀찮게 생각되었으므로 - 그때 마침 경성에 공연 왔던 덴가쓰 일좌에게 이토의 영향으로, 말하자면 예인(藝人)으로서가 아니고 소중한 손님으로서 언니가 맡겨졌다고 생각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으로 배구자는 이 단체의 들어가자마자 대를 이을 공주로서의 대접을 받기도 하였고 덴카쓰 남편의 성을 받아 노로가 메꼬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은 후, 그 세력 약화의 영향은 배구자에게까지 건네 졌다. 박대를 받은 건 물론이요, 단원들에게 자주 꼬집혀서 온 몸에 멍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입단한 단체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덴카쓰내에서의 배구자의 위치는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무용과 노래, 곡예 등을 만능으로 구사했기 때문에 이미 타단원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이어서 10살 때부터 무대에 선 배구자는 이미 16살에 ‘작은 덴카쓰’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배구자가 덴 카쓰를 탈출하게 된 추측은 두 가지의 설로 남겨져 있다.
첫 번째는 1926년 이곳에서 퇴단을 결심한 까닭은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아 이 예술단의 신데렐라가 되었지만 식민지인 조국의 상황과 일본인 단원들의 시기와 질투, 또한 다양한 춤을 배우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로 인해 예술단과의 갈등에 부딪치기 시작하다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으로 감행하게 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덴카쓰의 단장이자 양어머니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처지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라는 설중에서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추측컨대 덴카쓰 내에서 일어난 심심찮게 일어난 분열과 압박으로 인해 배구자의 덴가쓰의 탈출은 점점 비밀리에 몰래 기정 사실화되어갔던 것은 사실이었던 걸로 추측되며 배구자는 1926년 6월 3일 공연 중 미명에 덴카쓰 일좌를 탈출했다고 한다.
천승 마술단의 탈출의 의미는 당시엔 기생 외엔 전문적으로 춤을 배우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술단을 빠져나오게 되자 한동안 언론인 신문과 잡지에서 한동안 삼면기사를 장식했다고도 한다. 물론 1920년대 당시엔 기생 외에는 전문적으로 춤을 배우는 이가 없었으므로 배구자는 이래저래 화제의 여성이었다. 게다가 탈단 사건이 빌미가 되어 언론에 관심까지 갖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무용 수업을 받기도 전에 이미 다른 식에 스타가 되어있었다고 보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배구자는 양부모 앞으로 “노하실 줄 알면서도 이를 불구하고 쓰는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 같은 짓을 하면 안 되는 소녀의 마음을 용서하여 불쌍타 하여 주시고 불행한 저를, 박행한 소녀를, 불효 막심한 자식을 제발 잊어버려 주십시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때의 일을 두고 훗날 남편이 된 홍순언은 이 일은 전적으로 덴카쓰를 탈출하려는 배정자의 탈주를 순전히 그녀의 친부모와 배정자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일본에서의 탈주사건도 부모가 요구하는 돈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간에 배구자가 은신 3일 만에 고모 배정자가 황주까지 마중 나오는 배려 속에서 기차로 서울로 왔고 배구자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평범한 여자로 조용히 살겠다는 인간 독립을 선언한 배구자는 며칠 뒤 성북동 집으로 돌아왔으며 지치고 외로운 처지였는데도 불구하고 고모 배정자를 외면하고 돌아 누운 체 “ 왜 그랬어? ………왜 날 그랬어?……” 라면서 울부짖고 배정자를 정면으로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이 그녀의 출생 배경과 탈출 동기 등이 더욱 미스터리 한 수수께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새로운 자각
아주 어려서부터 풍토와 예술이 다른 덴카쓰 일화에서 자라며 일본 춤과 서양춤만 배웠던 배구자가 우리 춤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녀 나이 16살인 1921년에 덴가쓰를 따라 미국 만국박람회 공연 중에 안나 파블로바(Anna Pavlva)를 만나고서부터라고 한다. 러시아 민속춤을 바탕으로 한 실험적인 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발레리나이었던 안나 파블로바에게 한국인 최초로 발레를 배우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특히 순회공연을 다니는 동안 생긴 식견과 새로운 혜안으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각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