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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Nov 12. 2016

정통 클래식 발레를 배운 최초의 무용가 박외선

박외선(朴外仙) : 1915~2011

출생과 이력


  박외선은 1915년 12월 1일, 경남 진영에서 아버지 박상운, 어머니 박말보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영공립보통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여고에 진학했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와 춤을 좋아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여고 시절에는 꼭 무용가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만큼 춤에는 진지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마산여고 졸업 후에는 무용 전공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어서 일본 동경 문화학원 불문 학부에 입학, 동경 고전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무용을 공부하였다.



최승희와의 인연


  박외선은 여학교 3학년(16세) 때 마산 극장에서 제1회 최승희의 무용발표회에서의 춤을 보고 무용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몰래 집을 나와 밤차 타고 서울로 와서 최승희에게 오디션을 받은 후 곧바로 1주일 뒤 공연 팀에 합류할 정도로 무용에의 열정이 있었지만 부모들의 반대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행을 고집해 최승희의 소개로 박외선은 한국인 최초로 정통 클래식 발레를 다까다 세이코 (1900~1975)에 배운 점은 기존의 선구자들과는 다른 행보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정통 클래식 발레를 배운 최초의 한국인


  1935년 일본에서 무용을 배웠던 타카다(高田) 무용단에서 활동하며 일본과 해외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타카다 무용단은 교육과 공연을 병행하는 단체로 리드미컬한 율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박외선은 이곳을 계기로 발레를 배웠던 토슈즈를 벗고 이사도라 던컨처럼 현대무용으로의 전공을 선회하였고 해방 전까지는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일본에서의 활동명은 박계자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조택원, 최승희와 더불어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들보다 훨씬 빨리 활동을 접었다.




마해송과의 결혼


  황해도 개성 출신의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일본 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예술잡지 <모던 일본>의 창간인으로 매월 80만 부가 나갈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이었다. 조택원이 도쿄에서 무용발표회를 열기로 하고 <모던 일본>의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 마해송을 만났는데 그때 만난 박외선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그 사이를 이어준 사람이 바로 박외선의 스승 다카다 세이코는 아끼는 제자가 결혼으로 집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박외선은 남편의 부탁으로 무대에 서지 않고 내려와서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 2남 1녀을 낳아 기르게 된다.



무용계 입문 후의 활동


  1934년 4월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동경 음악학교와 니까이도(三階堂) 체조학교의 무용 강사로 출강하게 되면서 무용 교육자로 활동을 시작으로 1935년에는 조택원의 파트너로 조택원 제1회 창작무용발표회에서 서정적이고 고요한 이인무이었던 작품 <만종>에 출연, 조택원의 파트너가 되어 인기를 얻었고  <피기니니 카프리치오>에 출연하기도 했고 1936년에는 제1회 박외선 무용발표회를 동경 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이후 일본과 만주, 중국 등을 돌며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당시 이 공연은 기교적이었고 다까다류(流)의 발레에 가까웠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1937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압박받는 사람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세레나데>등의 레퍼토리로 창작무용발표회를 갖았고 1938년에는 일본 도호 영화사의 <토착민의 영웅>이라는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민란을 다룬 작품에 안무를 담당하고 춤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교육자로서의 삶


  1945년에는 전국 학교교육무용 지도자 강습회를 개성에서 열었고 1953년에는 이대 무용학과에서 학생들에게 현대무용을 가르쳤고 창작발레와 창작법을 가르쳤다.  1960년 체육학과 교수된 후 무용학과 독립 개설 위해 노력했고  1960년대 초반 미국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1963년 이화여대 무용과 개설은 기념비적 업적에 속하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대학 무용과 창설로 기록된다. 이화여대 체육과에 출강하던 시절 김활란 총장께 수차례 무용과 설립의 필요성을 건의한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로 평가되었다. 또한 1963년 2월 간절히 바라던 꿈 이뤄 국내 최초 무용이론서 <무용 개론>도 펴내 무용의 학문적 토대를 닦았다.  박외선은 한국 무용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제자를 길러냈다.



박외선의 말년


  박외선은 한 가정의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이었고 무용계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남을 수 있었던 그녀가 가장 많이 강조했던 것은 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이화여대 무용학과 교수로 23년 재직하면서 수 백명의 제자를 가르친 그녀가 정년을 3년 남기고 1977년 퇴직금 전액을 무용학과 장학금으로 내놓고 평소 자신은 구제 시장에서 구두를 사서 신을 만큼 검소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다. 은퇴 후, 박외선은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노후를 보내다 2011년 9월 3일 현대무용계의 뜰의 소녀는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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