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by_지니
최근,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되기까지 스스로에게 수많은 의문을 품어왔다.
어느 날은 석가모니의 말씀이 깊은 울림을 주고, 또 어떤 날은 형체조차 없는 무속신앙이 오히려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교회를 다니는 지금도 오늘의 생각과 내일의 생각이 다를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나 자신이 너무 양극단의 관념 사이에서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치기도 한다.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신이 내 안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한 사람의 내면에도 다양한 ‘부분적 자아’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상황과 감정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와 욕구가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내 안에 다양한 ‘부분적 자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스스로가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적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내가 과연 사람들 앞에 설 자격이 있는가 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우리 뇌는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끊임없이 계산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비교’, 혹은 ‘상상의 타자’ 개념으로 설명한다.
나 역시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오롯이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시선을 통해 들여다보곤 한다. 그래서 그 갈등이 더욱 복잡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다.
결국, 나는 ‘완전히 일관된 나’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에 얽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내면 싸움을 하면서도, 그 싸움을 마치 모두가 보고 있을 것처럼 두려워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모순과 유연함을 품을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완벽한 '나'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인정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떻게 여러 가지 종교를 믿을 수가 있어?”
그런 말이 실제 들리기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도는 ‘남의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도 그건 오랜 불안과 자기 검열이 만들어낸 현상이었을 것이다.
상상의 타자의 말이 실제처럼 느껴지고, 그것에 따라 가치관이나 행동까지 바꾸려는 경향은 뇌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신경과학 연구에서도 반복된 상상이 실체 없는 사건을 현실처럼 각인시키고, 행동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결과들이 많다.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에게 묻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만약 이 목소리가 없었더라도, 과연 같은 결정을 했을까?”
그리고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려 한다.
“오늘 나는 나답게 살았는가?”
그 질문이, 흐려졌던 나만의 ‘기준점’을 다시 찾아가게 도와준다.
최근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문을 외듯 말을 건다.
"난 나의 권리를 존중합니다."
"난 때로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냅니다."
"난 그 모든 자아를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