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은 마치 학업을 독려할 책임이 있는 교사라도 된 듯 말했다. 정확히는 진동으로 존재를 알린 태준의 메시지였다만. 수정은 그 문자 메시지를 가만 들여다봤다. 이때의 ‘야’가 감탄사의 ‘야’인지, 사람을 부를 때 호칭인 ‘야’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수정은 태준이 습관적으로 부르는 ‘야’라는 호칭이 못마땅했다. 평온한 날엔 저런 말본새는 어디서 배운 걸까 했고, 평온치 않은 날에는 이 연애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평온치 않은 날이었다. 검사 결과지를 앞에 두고 의사는 수정에게 성인 ADHD로 추정된다고 했다. “수치상으로 말이죠. 검사상으로.” 그 라임에 맞춰 검사지 윗줄에 반듯하게 적힌 글자가 수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떤 영화적 연출 같았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수정은 검사 결과를 두고 실망할 생각이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ADHD에 관한 정보가 많이 보였다. 인터넷 창을 길게 이으며 끝도 없이 내려가는 스크롤은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별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말끝을 기술적으로 어물거리는 하얀 가운의 의사 앞에 앉자 그럴 기분이 사라졌다. 전문성을 헤칠 만큼은 아닌, 상대를 배려하는 조심스러움이 드러날 정도로만 말끝을 흐리는 의사의 말투가 “실망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늙지도 젊지도 않고 적당했는데, 그의 모든 것이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아, 모나미 볼펜이나 점보 지우개를 연상시켰다. 무난함의 총체. 모든 것을 무난하게 통제한 결과가 하얀 가운으로 상징되는 우월함인 사람. 수정은 어쩐지 그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자신은 무언가를 통제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성적표를 받은 참이었다.
열흘 전, 첫 상담을 받을 때는 좀 다른 심정이었다. 진단명을 받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의심과 의혹을 확정 짓고 싶었다. 바람을 이루기까진 절차가 꽤 복잡했다. 수십 가지의 설문 문항에 답해야 했고, 의사 앞에 앉아 어린 시절을 되짚어야 했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검사를 받아보지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정은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 어린 시절을 말했는데, 의사가 증상이 의심된다는 표정을 지을수록 묘한 반발이 일었다. 돌이켜보면 상대가 너무 쉽게 정답을 맞혔을 때 생기는 반항심이었다.
“저는 어릴 적에 공부를 잘했는데요.”
수정이 한 반항은 고작 이것이지만, 이 또한 나름의 겸손과 절제를 갖춘 저항이었다. 어릴 적만이 아니었다. 소위 이름 있는 대학이라고 부를만한 곳에 들어갔고, 사학과라는 학과 특성상 암기할 것이 많았으나 동기들보다 뒤처진 적이 없었다. 이쯤 되자 ‘그래. 이상하지. 내가 그럴 리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정신이 번뜩 났다. 진단명을 받아 가야겠다는 결심이 고개를 든 것이다. 자존심 부리다가 진료비를 날릴 순 없었다. 수정은 자세를 고쳐 앉고 순한 표정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발주머니를 두고 오는 일은 흔해 빠졌고 지우개는 늘 어디론가 사라져 친구들에게 빌리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때는 지우개였던 것이 중학생이 되니 체육복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니 교과서가 되었다. 늘 무언가를 빌리려 다녔다. 요즘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려주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다. 실수를 책임지는 법을 가르치는 거라고 했다. 누군가 가져온 풍문을 두고 사람들은 각박해진 세상을 염려했지만 수정은 안도했다. 지금이 아니라 33년 전에 태어난 것을.
검사 결과지를 앞에 두고, 의사는 열흘 전 수정이 한 말에 답이라도 한다는 듯 말했다.
“학업 부진과 꼭 관련이 있진 않아요.”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지만, 얼마나 많은 환자에게 말했는지 모를, 그러는 사이 군더더기는 사라지고 결론만 남은 단문 앞에 수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정이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학부모도 아니었다. 이미 성적표는 지겨울 만큼 받았다. 어딘가 어긋난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듯 시험을 쳤고 대학은 잘 갔고 취업은 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주일에 닷새도 아닌 사흘을, 남들과 다른 시간에 출퇴근하는 일을 얻게 됐다. 그 사흘 동안 수정은 책걸상 사이를 거닐었다. 앉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의자는 작았고 플라스틱 책상은 약해 보였다. 그 책상에 어울리는 아이들은 더 작았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수정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다미였다.
곱슬머리에 붉은 뺨을 지닌 다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릴 적 보던 동화 홍당무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동화 줄거리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미가 내보이는 뺨처럼 붉은, 어떤 열기가 빨간 머리 홍당무를 연상시켰다. 다미의 학업 성적은 어떨까. 수정은 의사 앞에 다미를 앉히고 아이의 집중력과 참을성과 학습 능력과 성적을 염려하는 여느 부모처럼 그렇게 서 있고 싶었다. 아니, 다미에게 지루한 검사와 모나미 볼펜 같은 의사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같은 속도로 내내 버튼을 눌러야 했던 따분한 순간들과 검사실을 나오자 지루함은 사라지고 뒤늦게 몰려온 긴장에 심장이 살짝 흔들린 것 같던 기분을. 너는 어땠어? 묻고 싶었다. 왠지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것도 주의력 결핍인가 싶어 입술을 닫아 물었던 것까지. 다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미는 수정이 방과 후 강사로 있는 학교의 학생이었다. 수정은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목수초등학교에서 독서지도를 하고, 수요일에는 삼양초등학교에서 글짓기 수업을 했다. 삼양초등학교 주임은 엉뚱했는데, 그 엉뚱함에 갑을 관계가 들어오자 종종 권위적인 모습이 됐다. 수정이 처음 수업하러 간 날, 계획표에 글쓰기 수업이라 적자 주임은 그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여기.” 여기에는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네? “글쓰기 아니고 글짓기요.” 글쓰기와 글짓기를 구별하는 주임은 수업을 듣는 학생 수가 열두 명이라고 했다. 작은 학교치고 나쁘지 않은 인원이었다. 4학년 5명. 5학년 3명. 6학년 4명. 학년이 섞여 있다는 말에 수정은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그럴 수도 있지. 방과 후 수업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4년 차 강사인 수정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같은 것은 자주 봤고, 학년이 섞인 수업 같은 것은 일어나서 안 되는 일에 속하지도 않았다.
열두 명의 아이들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선생님을 불러 세웠다. 시 쓰기를 가르치면 4학년 아이들은 ‘말랑말랑’ ‘살짝살짝’ 같은 글자에 색연필로 덧칠한다며 필통을 바닥에 엎고, 6학년 여자애들은 연서를 쓴다면서 어깨를 붙이고 앉아 저희끼리 끅끅 웃음을 참아냈다. 무얼 쓰니? 짐짓 모르는 척 물으면 어느 날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어느 날은 소매로 종이를 가린 채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은 사춘기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거야. 어느 날은 장난스럽고 어느 날은 짜증스러운 사이에서 하얗고 몰캉한, 유독 볼이 붉은, 그래서 놀림당하기 딱 좋아 보이는 다미가 있었다.
다미는 수업 시간 내내 홀로 앉아 연필을 쥐고 꾹꾹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반듯하던 글씨는 1분도 지나지 않아 출렁출렁 공책 칸을 넘나들었다. 그런데도 중간에 그만 쓰겠다는 말이 없었다. 그 점이 신기했다. 글쓰기 수업에는 보통 반듯하게 끝까지 써 내려가는 소수의 아이와 중간에 못 쓰겠다고 연필을 놓아버리는 다수 아이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글씨체는 당장 연필을 내려놓고 공책을 박박 찢어도 이상할 것이 없이 넘실대는데 그래도 글 한 편을 다 써냈다. 그게 기특하달까. 아니다. 처음에는 연민이었다. 다미는 아이들의 농담이나 수정이 하는 우스갯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웃었는데, 아이들은 놀랍도록 그런 다미를 개의치 않았다. 장난을 치고 저희끼리 웃고, 거기에 빠지지 않는 다미의 웃음은 그저 배경음악 같았다. 웃음은 주눅 든 기색도 없이 줄어들 줄 몰랐다. 그제야 수정은 자신이 다미에게 느낀 붉은 열기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다미는 애를 쓰고 있었다. 그 애씀이 힘에 부쳐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