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평화시위가 가능했을까
매번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흑인 진압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그리고 흑인 시위일 경우 매우 과격해져서 사상자가 나오거나 건물이나 차가 불탄다. 반면,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정부가 시민을 탄압했으면 했지 시민이 집단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문 시위꾼들은 예외).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집회에는 100만 명이라는 숫자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대의 차도 불타지 않았고, 사상자도 없었다. 당시 대전에 살던 나도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험악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뭔가 축제 분위기라 살짝 어리둥절했었다. 모두가 분노하고 있었지만 예술과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었다랄까. 게다가 거리에서 군것질하는 재미까지 영락없는 축제였다. 아무튼 내가 생각했던 시위와는 많이 달라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우리나라 촛불 집회를 보며 전 세계 외신들이 이렇게 대규모의 평화 집회가 가능하다는 것에 경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이것이 그렇게 감탄할 일인가 갸우뚱했지만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현지에서 겪어보니 당연한 리엑션이었다. 몇천 명도 모이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난리가 나는데 100만 명이 훨씬 넘게 모인 집회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외신 입장에서는 기적인 것이다.
요 며칠간 우리나라 시위와 미국의 시위가 뭐가 다르길래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몇 가지 이유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겠지만 떠오르는 생각들을 세 가지 이유들을 정리해봤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우리나라의 시위는 대게 분명히 관철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독립, 독재정권 타도, 직선제 쟁취, 박근혜 탄핵, 검찰개혁 등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구호, 즉 구심점이 있었다. 주 시위 대상이었던 정부 권력이 이것을 수용할 때까지 이 구호를 줄기차게 외쳤다. 그리고 그 구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응축된 에너지를 만들고, 끝내 변화를 가져왔다.
반면 현 미국의 시위는 저항 정신에 기반하는 것 같다. ‘No justice, No peace’라는 구호를 외치긴 하지만 그 구호를 관철시키기 위해 외친다기보다 불의한 권력에 항의한다는 저항의 메시지로 사용한다. 즉, 사회가 약속한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저항의 표시로 구호도 외치고, 경찰차도 불태우고, 상점도 털고(?) 그러는 것이다 (사실 약탈은 다른 개인의 주권을 불법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 변병의 여지가 없다).
한마디로 한국은 ‘이렇게 해 달라’라고 요구하는 반면 미국은 ‘우리가 이렇게 분노하니 알아서 해결하라’라는 느낌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시위의 대상은 대부분 권력자에게 향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은 시민들 사이에서 어떤 권력의 불합리에 대한 컨센스가 만들어지고 그 공통된 의견을 표출하는 의미로 시위가 일어나는 것 같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민들은 동의를 함에도 꼭대기가 버티고 있으니 그 꼭대기를 향해 바꾸라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미국의 시위 같은 경우 표면적으론 불의한 공권력에 항의하는 것 같지만 정작 들여다보면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향의 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한 구성원이 사회를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는 이미 시민사회가 합의를 보고 권력을 향하는 시위라면 미국은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차별의식을 향하는 시위인 것 같다. 아 진짜 쓰면서도 참 답답하다.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서.
한국도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화염병을 던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이 많이 바뀌게 된 계기는 그런 모습을 꼬투리 잡아 시위 자체를 폄하하려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론들 너네 얘기야). 나아가 폭력 시위를 유도하기 위해 전문 시위꾼들을 동원한 이야기는 너무 흔해 식상할 정도다. 이제는 모두가 전문 시위꾼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때문에 한국은 국민적으로 폭력=시위의 변질이라는 공식을 학습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쪽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원하지 않더라도 이 시위를 어떻게든 폄하하려는 세력들에게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광화문 집회 때 자주 목격되던 것이 프락치로 의심되는 사람이 폭력을 유도하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사람을 묻어(?) 버리는 광경이었다. 나의 분노의 표출보다 메시지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시민들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미국은 학습 단계인 것 같다. 우리같이 언론들이 대놓고 편을 가르지 않아서 그런지 학습이 더딘 것 같다 (CJD의 순기능?). 흑인들의 입장에 서주는 언론도 있고 좀 더 백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언론도 있기 때문에 시위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해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격하게 할수록 메시지가 더 잘 전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뉴스에 더 크게 보도되니까.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머리에 남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위험하다는 강화된 선입견과 함께. 이백 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차별이기에 조금만의 자극이 와도 폭발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평화시위인 것 같다. 아니면 아예 프랑스 대혁명으로 가던지.
이 외에도 국민성, 역사 등등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나중에 더 생각해보려 한다.
----------
그냥 현실이 답답해서 글적여 봤다. 외노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입장도 이렇게 답답한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들과 뜻을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