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찰과의 첫 조우
이번 그랜드캐년 여행의 마무리는 라스베가스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고 LA로 귀환하는 일정이었다. 이번 여행 내내 하루에 4시간 이상 운전하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박사님과 내가 하루씩 돌아가며 운전을 했다.
홀슈밴드에서 라스베가스로 돌아오는 날은 박사님이 운전대를 잡으셨다. 광활한 아리조나나와 유타를 횡단하는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박사님이 나지막이 읊조리셨다: “아, 망했다.” 순간 상황파악이 안되어 차가 이상이 생겼나 계기판을 체크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물으니 백미러를 보며 박사님 왈, "아무래도 과속단속에 걸린 것 같아요."
순간 사이드미러로 뒤를 확인하니 헉, 정말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경찰이 현란하게 하이빔과 빨간 파랑 불빛을 번쩍거리며 우리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정말 그 순간은 범죄자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비현실적이었다.
다행히(?) 박사님은 예전에 한번 단속에 걸린 경험이 있으셔서 능숙하게 도로 밖으로 차를 대고 경찰이 나오기 전에 미리 운전면허증을 꺼내놓고, 손을 핸들 위에 올려놓으셨다. 정확히 내가 인터넷에서 본 단속에 걸렸을 때 해야 할 프로토콜이었다. 아마 나였으면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가 경찰이 오고, 면허증 꺼내려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총 맞았을지도. 플로이드 사건 이후 경찰에 대한 경각심이 더 커져서 더 당황했던 것 같다. 박사님도 많이 당황하셨는데 애써 침착해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ㅋㅋ
왕복 2차선이라 경찰이 도로 바깥쪽인 내 쪽 창문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비디오 녹화를 시작했다(물론 폰은 무릎 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혹시 총 맞으면 우리는 innocent 했다는 증거가 될 테니..
선글라스를 낀 훤칠한 백인 경찰이었고, 쉐리프(Sheriff, 카운티 경찰)였다. 엄청 거친 심문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스한 경찰이었다. 아래는 비디오에 녹음된 대화록:
경찰: "안녕, 하와유 가이즈"
우리: "(얼음)굿굿"
경찰: "내가 왜 너희 잡은 줄 아니?"
박사님: "과.. 속?"
경찰: "응 맞아. 너희 어디로 가능 중임?"
박사님: "라스베가스."
경찰: "이 차 너 차야?"
나: "내 차임."
경찰: "오케이. 너 여기 속도제한 얼마인 줄 알아?"
박사님: "65(마일)"
경찰: "너 몇으로 운전하고 있었는지 앎?"
박사님: "엄... 80?"
경찰: "89."
우리: "아.. 그렇군요(망했다)."
경찰: "ID 줘볼래?(박사님 아이디 건네줌)"
경찰: "차 등록증 있니?"
나: "(차 앞쪽에 붙어있는 임시 등록증 가리키며) 임시임"
경찰: "오케이.. I'll be right back with you guys."
생각보다 괜찮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범죄를 저지를 상은 아니었나보다. 문제는 벌금이나 벌점이 얼마나 나오느냐 였는데.. 경찰의 태도를 봐서는 훈방을 기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한참 뒤에 돌아온 경찰은 우리 직업이 뭔지를 물어봤다. 바이러스 연구한다고 하니 COVID-19도 하냐고 하길래 (나는 안 하지만 연구실이) 한다고 했다. 그러자 빨리 해결해 달라며 웃길래 어 뭔가 분위기 괜찮네 싶더니 역시 훈방처리로 끝이 났다. 보통 규정속도를 15마일 이상 초과하면 벌금과 벌점을 무는데 나이스한 경찰을 만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박사님도 이런 자상한 경찰은 처음 만나봤다고 하셨다(박사님, 이번이 두번째 아니셨나요?).
어쨌든 처음으로 경찰차에 추격당하는 경험을 해 봤다. 감사한 것은 이 경험이 경찰에 대한 트라우마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과속하면 사막 한가운데서도 잡힌다'는 교훈을 확실히 마음에 새겼을 뿐이다.
이후 박사님은 정확히 65에 크루즈 모드를 걸어놓고 운전하는 모범 운전수가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