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은 아빠(부모) 교육 영화
영화 '지상의 별처럼'은 인도에서 2007년도에 개봉,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에 개봉했다. 영화가 국내에 개봉될 당시 대전에 있었는데 상영하는 곳이 없어 안타까워만 하다 놓친 기억이 난다. 그리고 8년 후인 며칠 전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가슴이 삭막할 때 적극 추천하는 찐 힐링 영화다.
'지상의 별처럼'은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주인공, 인도 국민배우 아미르 칸이 감독 겸 주연인 영화이다. 하지만 아미르 칸과 함께 합을 맞춘 아역배우 다실 사페리의 비중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첫 한 시간을 거의 혼자서 영화를 끌어나갈 뿐 아니라 영화 설정상 어른도 소화하기 힘든 몇 번의 감정 기복 연기를 거뜬히 소화하는 슈퍼 아역이다. 클로즈업샷이 대체 몇 번이나 나오던지.
감동받은 영화라 글이 깁니다. 스압주의.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뻔한 스토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뻔하지 않은 명작이라 생각한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핵심 메시지 전달에 충실한 영화다. 그 핵심 메시지는 바로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이다.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
(Every child is special)
이 영화가 유독 흥미로웠던 이유는 한 아이의 재능을 이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한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은 단연 미술 선생님이지만 선생님 외에도 주인공 이샨이 이샨 되는 데 있어 숨은 공로자들을 이번 후기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숨은 주인공인 이샨의 아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해보려 한다.
영화의 초반 1시간은 주인공 이샨을 중심으로 흘러가며 대사가 많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샨이 살아가는 일상인 학교와 집, 그리고 거리로의 일탈까지 담담히 조명하며 이샨이 어떤 아이인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를 담아낸다. 영화를 보는 내가 바로 이샨이 되도록 영화는 초반 1시간을 오롯이 이샨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한 시간 동안 내가 주목해서 봤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샨의 엄마다.
아이들을 위해 커리어도 포기했는데 뭐가 문제인 거지?
학부모 상담 후 절망감에 빠진 엄마가 울며 아빠에게 하는 말이다. 성적이 낮아 이미 한번 과락을 했음에도 전혀 발전이 없고 오히려 반항적으로 변해가는 이샨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들의 포기 선언에 엄마는 충격을 받고 자책한다. 커리어도 희생해가며 최선을 다했음에도 더욱 엇나가는 자식에 대한 무력감의 토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있었기에 이샨이 미치지 않고 버틴 것이다. 반사적으로 다그치는 아빠와는 다르게 엄마는 항상 이샨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노력한다.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 나 같으면 한 대 쳤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샨! 이샨!! 이샨!!!!"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엄마의 모습, 자신의 분을 주체하지 못해 얼마든지 체벌로 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끝까지 참는 엄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들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 5시에는 아빠, 새벽 6시는 형, 7시에는 이샨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정신없는 일정을 엄마는 소화해야 한다. 벌떡벌떡 일어나 알아서 준비하는 아빠와 형과는 달리 밥 먹이는 것부터 세수, 양치, 교복 입히기까지 다 거들어줘야 하는 철부지 이샨을 상대하는 엄마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저런 싸움을 싸우는 엄마.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이샨을 사랑했다.
이샨이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이샨의 어릴 적 비디오를 보며 운다. 비디오에는 아기 이샨의 모습이 나온다. 베이비 이샨이 무엇을 하던 감탄과 찬사를 보내던 시기를 재생하며 엄마는 계속 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계속 자책했으리라. 나중에 나오지만 이샨은 난독증에서 오는 좌절감을 분노와 반항으로 표출했기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샨의 일탈을 넉넉히 감싸주는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엄마가 없었다면 미술 선생님을 만나기도 전에 아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엄마는 위대하다.
가짜 조퇴서 같은 건 못써줘
이샨이 학교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단조퇴를 했던 날 밤, 엄마 아빠가 알면 곤란하니 이샨은 전교 1등의 똑똑한 형에게 가짜 조퇴서를 써 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형은 츤데레. 그런 건 절대 못 해준다고, 엄마에게 땡땡이친 사실을 말하겠다고 하지만 못 이기는 척 가짜 조퇴서 조작에 합류하는 그런 형이다.
부모님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형에게 터놓는 이샨을 보며 엄마에 이어 마음의 2차 보루는 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직적으로는 품어주는 엄마가 있다면 수평적으로는 내 편인 형이 있기에 이샨은 건강한 정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숙학교에 이샨을 혼자 남겨두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가 우는 모습이 먼저 비치지만 곧이어 똑같이 눈물을 훔치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엄마만큼 형도 많은 감정들이 교차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또한 주말에 이샨 기숙학교를 방문해 이샨에게 물감세트를 선물하는 형은 이샨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격려를 받는지 아는 형이다. 영화 내에서 엄마와 형은 이샨을 온전히 지지해주고 보호해주는 2중 보호막이다. 심지어 아빠가 미처 채워주지 못한 정서적 빈 공간을 채워주기도 한다. 진정한 숨은 공로자다.
네가 얘기했던 것이 진짜 의미 맞아. 다른 애들은 배워서 외운 걸 말한 거고.
라잔이 이샨을 만난 첫 수업 날, 이샨은 선생님이 묻는 시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한다. 하지만 철학적인 이샨의 답을 이해 못한 선생님은 이샨을 혼내기만 한다. 상심한 이샨에게 짝 라잔은 수업이 끝나고 네가 맞게 대답한 거라고, 네가 맞았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 짧은 대사에서 라잔이 매우 똑똑하며(선생도 이해 못한 이샨의 답을 이해하는 고수..) 마음까지 따뜻한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마디가 이샨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이샨 주위에는 유독 1등이 많다. 형도 1등인데 라잔도 1등이다. 하지만 목발을 짚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구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이 이샨과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그런 것 있지 않는가, 딱히 친구가 나한테 위로해준 것은 없는데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 이샨이 라잔과 함께 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물론 학업면에서는 넘사벽 괴리감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또 삶의 부질없음에 난간 위로 올라가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이샨에게 라잔이 위험하다고 외치며 달려오다 넘어지는 장면은 그가 이샨을 아낀다는 것을 잘 나타낸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샨이 학교에서 혼자 울며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모습이 자주 나오지만 끝내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진짜 친구가 최소 한 명이라도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목발을 짚는 라잔을 이샨이 말없이 부축하고 도와주는 장면들은 둘 간에 보이지 않는 우정이 쌓여가는 것을 보여준다. 벼랑 끝에 몰린 이샨이지만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런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하하
괴팍한 이샨의 행동에 반 친구들은 웃는다. 하지만 최근에 봤던 넷플릭스의 '인간 수업'에서처럼 그를 괴롭히는 친구는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이샨이 잘 되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반 친구들을 보며 차마 그에게 다가가진 못했지만 소심하게 그를 응원했다는 사실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설사 이샨을 응원하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괴롭힘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플러스를 주고 싶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밟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이샨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 말이다.
선생의 계획으로 다른 문제가 없길 바랍니다.
미술 선생이 이샨에 대해 제안한 여러 요구사항을 승낙하며 교장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사실 승낙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샨이 난독증이지만 특수학교에 보내지 말자는 제안도 거버울텐데 이샨 맞춤형 교육까지 제안하는 미술 선생님의 제안까지 받아들이는 교장 선생님의 결단을 보며 결국 이렇게 제도적 뒷받침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실 뒤집어놓고 보면 미술 선생님의 제안은 이샨에게 특혜를 주는 행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미술 선생님의 열정이긴 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런 특별한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보통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을 하고 있는 이샨이 최소한 숨을 쉴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 교장 선생님의 허락이 없었다면 임시 선생이었던 미술 선생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처럼 책임지는 어른이 있었기에 이샨이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감동적이라고만 치부하기엔 그의 행동은 치밀했다.
그가 어떤 전략을 취했는지 단계별로 살펴봤다.
거기서 누굴 만났어?
나 자신.
미술 선생 니쿰브는 심한 우울과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이샨의 상황을 바로 인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샨의 행동의 궁극적인 원인은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그의 노트를 통해 파악한다. 나아가, 이샨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한다. 그가 빠르게 이샨을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니쿰브 자신이 어릴 적 난독증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샨이 어린 나이임에도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니쿰브는 안타까움에 혼자 눈물을 훔친다. 그 장면을 본 특수학교 동료 선생님(이지만 연인관계 같은 여성분)은 니쿰브에게 기숙학교에서 누굴 만났냐고 묻자 니쿰브는 자신을 봤다고 대답한다. 임시 미술 선생이지만 특수학교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그는 아이들을 존재 자체로 사랑할 줄 아는 진짜 선생이다.
모든 아이는 자신만의 능력과 꿈을 갖고 있어요.
니쿰브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는 이샨의 집으로 찾아가 부모님을 만난다. 그리고 설명한다. 이샨이 왜 그렇게 집중하지 못하고 반항적으로 변해갔는지. 아빠에게 중국어를 읽어보라는 기발한 비유로 이샨이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지금의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이라고 친절히 설명을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빠에게 니쿰브는 이를 악물고 말한다. 모든 아이는 자신만의 능력과 꿈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아니면 이 애는 희망을 잃을 겁니다.. 천천히 가르치면 나아질 겁니다.
가족이 이샨을 품게 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바로 플랜 B를 가동한다. 가정이 할 수 없다면 나라도 하자 전략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학교 시스템에 묶인 일개 선생일 뿐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기에 그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이샨의 상태를 설명하고 유예기간을 줄 것을 설득한다. 그의 정성 때문일까 그의 2차 시도는 성공한다.
좋았어. 거기에 5를 더해.
이후 니쿰브는 이샨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맞춤 교육을 시작한다. 수학 계단으로 덧셈과 뺄셈 개념을 가르치고, 비슷한 모양의 알파벳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함께 점토로 알파벳을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망이 없어 보이던 이샨이 글자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보통 아이처럼 문장을 읽고 쓰기 시작한다. 이샨이 니쿰브를 통해 성장하는 이 장면은 참 뭉클하다. 꼭 직접 보시길.
니쿰브는 이샨의 미술적 재능을 살리는 동시에 그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난독증이라는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순간이다.
교장 선생님, 졸업 후에 그림 그려 본 적 있으세요?
내가 심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니쿰브는 한 인격이 성장하기 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작은 성공, 즉 사람은 ‘인정받는 경험’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괘도에 오른 이샨에게 남은 것은 바로 그의 재능이 인정받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롯이 이샨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이름하야 전교 사생대회.
그리고, 두각을 나타낸 이샨의 작품은 외부인사가 선정한 대상작으로 선정된다. 이샨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순간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찾는 그 순간에도 그가 숨는 장면은 아직 위축된 그의 자아를 보여준다.
상장을 받고 전교생이 기립박수를 쳐주는 그 순간 이샨은 니쿰브에게 울며 달려가 안긴다. 억눌려왔던 그의 설움이 해소되는 동시에 존재를 인정받은 기쁨의 순간을 훌륭하게 표현해 낸 장면이라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은 여기서 통곡하실지도. 아, 그리고 이샨에게 밀려 2위를 차지한 니쿰브의 작품 또한 개인적으로 너무 감동적이었다(이 포스트의 커버 사진). 사실 그 그림을 본 이후부터 자꾸 눈에 습기가 찼었다.
그만 가봐야겠네요
니쿰브 선생의 가정방문 이후, 아빠는 굳이 학교를 방문해 다시 니쿰브 선생을 만난다. 이유는 자신이 아이에게 관심 없는 매정한 아빠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즉, 그는 이 시점까지 아이를 생각한다기보다 아이를 통해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니쿰브와의 두번째 만남은 그를 완전히 흔들어 놓는다. 자신이 이샨을 수렁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임을 깨닫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만 가봐야겠네요." 개인적으로 니쿰브와 아빠의 대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이며 영화의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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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이샨도 아니고 니쿰브 선생도 아니고 아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한결같았던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처음과 끝이 극명하게 다른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빠다.
생각해보면 이샨의 방황은 아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샨의 아빠는:
1) 가정을 위해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지만 동일한 잣대를 자녀들에게 들이대는 아빠였다. 그렇기에 아들의 조그만 실수에도 분노하며 기숙학교로 보내버릴 거라고 윽박질렀고, 끝내 기숙학교로 보내버리는 결정까지 내려버렸다. 기숙학교는 죽어도 가기 싫다는 아들의 눈물은 훗날의 감사로 돌아올 거라는 그만의 믿음이 있었는지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 온 첫째의 성공담에 취해 둘째의 눈물은 사치로 생각했으리라.
2) 원인을 보려 하지 않고 현상만 보는 아빠였다. 왜 이샨이 학교를 째고 위험한 거리를 홀로 방황했는지, 왜 조퇴서를 위조하는 비행을 벌이는지, 왜 아이들과 싸우는지, 왜 분노가 많은지. 모든 원인을 '게으름'이라고 치부하기엔 설명되지 않음에도 현상만을 보고 자제력이 부족한 아이로 낙인찍어 버리는 아빠였다. 그렇기에 기숙학교를 보내는 선택은 그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3) 원인을 진단해줘도 어쩔 수 없다고 회피하는 아빠였다. 난독증이라는 정확한 진단을 해주는 선생이 집까지 찾아와도 어쩔 수 없다고 회피하는 아빠의 모습은 아이보다는 자신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그의 철벽 같은 신념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반면, 미술 선생 니쿰브는 아빠의 역할을 잠시 대리하는 역할이었다. 영화는 아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아빠의 공백을 니쿰브가 어떻게 채워주는지 상세하게 보여줌으로써 좋은 아빠란 어떤 아빠인가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좋은 아빠를 상징하는 니쿰브가 자신의 미술실로 찾아온 미숙한 아빠에게 전달하는 대사는 정확히 아빠가 했던 행동의 반대이다. 둘의 대화 장면을 그대로 옮겨와 본다:
자신이 아이를 위해 했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정작 아이를 말라 죽여버리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빠는 떨리는 가슴과 고이는 눈물을 들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뜨지만 밖에서 글씨를 또박또박 읽게 된 이샨을 보고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도망치듯 이샨이 자신을 보기 전에 떠난다. 진정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방학을 하여 이샨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빠는 니쿰브 선생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 또한 흔한 부모의 감사 장면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아빠의 완전한 회심에 쐐기를 박는 장면이며 이샨을 이전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양육할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그런 아빠의 결정에 응수하듯 이 영화는 이샨이 하늘로 비상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