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청협] 프롤로그
누구에게나 잊지 못 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좋든 싫든 내 삶에도 많은 변화를 준 시간들이 있다. 방황을 했던 고교시절, 희망찬 삶을 그렸던 군대생활, 아직 졸업을 못 했지만 많은 경험을 한 대학시절 등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매 순간들이 모두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 중 제주청년협동조합은 확실히 특별하다. 많이 배우며 경험한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지긋지긋하다고 손사래를 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돌이켜보니 소중한 시간이었다.
“형~ 이름 좀 쓸게요.”
“뭔데?”
“협동조합 하나 만들려고요.”
“그래.”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배울게 많은 낙일선생의 부탁으로 시작했다. 이름을 올렸더니 시간이 되면 창립총회에도 와달란다. 딱히 할 것도 없어서 그냥 갔다. 창립총회에서 어쩌다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제서야 이 협동조합의 이름이 ‘제주청년협동조합’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사람도서관’이라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다양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험담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제주청년협동조합은 그 과정에서 사람책으로서, 이용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온 나로서는 이번에도 재미난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창립총회 이후 부푼 기대감과는 다르게 왜 모였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전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공감대는 있었다. 모이는 것 자체가 이 제주청년협동조합의 취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새로운 기대감과는 다르게 아무런 계획이 없는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창립을 준비한 낙일선생과 티격태격도 많이 했다. 화내는 모습도 처음 본 것 같다.(이 후 엄청 많이 티격태격 했지만)
창립총회 이후 어쨌든 제대로 된 법인으로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는 알렉스라는 친구가 상당히 고생했다. 창립자는 한 달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이사진들도 각 자의 직업들이 있었다. 행정 처리를 처음 하는 알렉스는 도청, 시청, 법원, 세무서를 발로 뛰어다녔다. 그의 노고 덕분에 청협은 한 달만에 사업자를 등록하고, 파인땡큐라는 카페 영업신고도 마쳤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가끔 밥을 사주는 것이 전부였다.
형태를 갖춘 청협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였으니 이제 뭘 할지를 고민했다. 우선은 파인땡큐를 어떻게 할 것이냐? 앞으로 제주청년들과 어떻게 만날 것이냐? 뭐 이런 고민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10명 정도의 조합원 중 청협만 할 수 있는 조합원은 없었다. 당시 그나마 직원으로 고용 된(말이 고용이지 월급은 없었다.) 알렉스만이 있었다. 그런데 알렉스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하나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대 이사장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창립연도를 넘기지 못 했다. 형태는 있으나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우왕좌왕, 탁상공론 중에도 몇 가지 프로젝트는 진행됐고, 청협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청년들이 생겼다. 사회적경제아카데미, 응답하라2030 등과 몇 차례의 공식적인 토론회에도 제주청년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걸친 행사들로 또래 친구에 대한 갈망이 있는 청년들과 주변 시민사회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많은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주 청년 운동의 시작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모이면서 청협은 좀 더 활성화가 되었다. 독서, 영화, 여행 등의 소모임과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지역의 몇몇 행사에 초대되어 함께 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청년 정책도 활성화 되었다. 조례가 만들어졌고, 청년 거버넌스를 구축되기 시작했다. 담당자들은 가장 활성화되어 보이는 우리는 청협을 찾았다. 공무원 답게 우리 조직에 대한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조합원은 몇 명인가요?”, “무슨 사업을 하시나요?”, “고용자는 누구인가요?” 등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저도 조합원이예요?” 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슈가 생겼다. 첫 번째는 16년도 촛불혁명에 우리가 함께 할 것이지에 대한 논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논의 때문에 화가 많이 났다. 그 이유는 나름 공부한 협동조합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책임을 회피하였고, 논의 구조가 누군가의 허락을 받는 모습이었다. 또한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성보다는 주변환경에 대한 논의만 이루어졌다. 그 때로 돌아가서 다시 논의를 한다고 해도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 두 번째는 우리의 공간인 파인땡큐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많은 활동을 했지만 우리는 1년에 700만 원도 마련하지 못 하고 있었다. 뭔가를 해서라도 파인땡큐를 유지할 것이냐? 이런 고민들은 17년도 총회로 넘기기로 했다.
이 두 가지 이슈가 청협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좋은 공동체였다. 그에 반면 이 좋은 공동체를 지속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냥 동아리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딱히 명확하게 말을 할 수 있지는 않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논의를 해야 한다. 이제는 40명이 넘는 협동조합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