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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뤼 Jul 13. 2021

붙잡지 못한 그때 그 사람

내 짝사랑이 항상 엉망인 이유

졸업 직전 학기, 영어 발표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던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키가 크거나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구체적인 삶의 비전을 갖고 있었고, 지성미가 넘치며 선한 인상으로 사람들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기엔 낯간지럽지만, 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학우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그때 그가 전한 이야기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운동권 출신인 아버지는 젊은 시절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로 밤마다 악몽을 꾸셨다. 그는 아버지의 악몽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물리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 어느 다외활동을 하며 영상 일을 접하게 되었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 대신 영상을 만들어 악몽을 꾸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시사pd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가 경험한 고통에서 시작해 자신과 무관한 타인으로까지 시선을 돌리는 그 태도가 멋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드라마pd를 꿈꾸는 나와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것 같아 눈길이 갔다.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타이밍만 재고 있었을 무렵, 우연치 않은 계기로 그와 강의실 밖에서 마주쳤다. 이런 게 바로 운명인가? 싶었다.


드라마pd 채용 시험에 응시하러 가던 날. 시험 장소는 뚝섬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한 초등학교였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학교로 걸어가던 중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안녕하세요"

그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었다. 후광이 났다.


"저... XX수업 같이 듣는"

혹여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세라 수업 이름을 언급하며 인사를 건넸다.


썅. 이렇게 마주칠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좀 잘 차려 입고 갈 걸. 찢어진 청바지에 후줄근한 후드티가 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지 않게 용기를 내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시사 쪽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시험 준비는 어떻게 했는지, 또 지원한 곳들이 있는지.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고사장에 다다랐다. 그는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을 사야 한다며 이쯤에서 헤어지자 했다.


예상대로 나는 광탈했고, 그는.. 잘 모르겠다. 그가 다음 전형으로 통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수업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고, 이를 통해 그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빛과 매사에 야무진 그라면 채용 시험쯤은 거뜬히 통과했을 거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데, 안 보일 땐 얼마나 더 그립던가. 못 본 지 약 2~3주쯤 지났을 무렵,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너어어무 궁금하다! 없어진 뒤에야 그가 내 마음속에서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깨달았다. 오늘은 오려나? 다음 수업엔? 그다음 수업엔?


강의실로 향하는 길, 내 머릿속은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혹시라도 일찍 와 있으면 용기 내어 말 걸기.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여느 때처럼 그 사람 생각을 하며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이었다. 평소에는 강의실이 있는 4층까지 걸어 올라가곤 했는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엘리베이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렸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고, 오늘은 오겠지? 마주치면 뭐라 말하지?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뒤엉킨 상태에서, '후',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안녕하세요."


그가 바로 옆에서 인사를 건넸다.


심쿵.


이 단어, 그냥 활자 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날 알았다. 땅에 떨어진 심장을 두 손으로 간신히 움켜잡으며 재빨리 곤두선 신경과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생각의 회로를 가동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계속 면접 보러 다니시나 봐요?"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네, 오늘이 드디어 최종 발표 날인데 너무 떨리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가 못 붙을 리 없었다. 온 맘 다해 축하해주고 싶었으나, 혹여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조금은 절제된 환호를 드러내며, 이미 붙은 거나 다름없을 거라고, 축하한다고 전했다.


그런데 대화가 끝나고 문득 스친 생각- 만약에 진짜 최종 합격하면 오늘을 끝으로 이제는 영영 못 보겠구나. 듣자 하니 붙으면 바로 다음 주부터 인턴 생활 시작한다고 하던데.


수업 시간 내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이렇게 놓치기 싫은 사람은 처음이라. 누군가의 연락처를 물어본 적도 없는 나라, 살면서 용기 한 번 제대로 내본 적 없는 나라. 어떻게 하지? 엄마, 아빠. 도와줘.


수업이 끝나자 강의실 문을 나서는 그를...






나는 끝내 붙잡지 못했다. 그날이 그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허탈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인가. 어차피 후회로 점철된 인생, 갈수록 후회가 쌓여만 간다.


이 뼈아픈 상실을 계기로 배운 게 있다면,

"운명이라면 언젠가는 또다시 만난다"는 해괴망측한 낭만 따위는 이제 진짜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딴 거 없고, 표현하지 않으면 -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운명도 나를 빗겨간다.


마음껏 표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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