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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뤼 Apr 07. 2022

지난날의 과오까지도 덮어주는 '청춘'이라는 필터

<스물다섯 스물하나> 결말

나희도의 남편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물다섯 스물하나> 희도의 남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오인할  있다. 더구나 본 작품과 바슷하게 8~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상징적인 작품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 찾기 서사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동일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쨌든 익숙한  좋아하고, 보지 못한  꾸며낼 재량이 많지는 않은 동물이기에.


오히려 <스물다섯 스물하나> 청춘들의 꿈을 무자비하게 앗아가던 시대에 “네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곳에  응원이 닿게 할게. 내가 가서 닿을게라고 말하며 나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말해줬던  사람, ‘지금 나를 만들어준 과거의 인연, 사건 등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희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가슴이 시키는 일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던 ‘나’, 그런 ‘ 묵묵히 바라봐준 ‘ 조명하는  의의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젊음이란 실패담

우리의 젊음은 반짝이는 순간만큼이나 이불킥하게 만드는 ‘흑역사’로 가득하다. 성취가 있다면 상실도 있는 법. 그저 꿈으로만 남을 것 같았던 세계적인 펜싱선수, 그리고 기자라는 ‘꿈’이 현실이 됐다면, 첫사랑쯤은 희미한 기억 저편으로 던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희도가 내린 (이별의) 결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는 싱글-워킹맘으로 늘 바빴던 엄마를 마냥 기다리고, 또 기대에 부풀어 있다 체념하기를 반복했던 희도의 어린 시절을 끌고 온다. 이제 더는 기다리고 어긋나고 실망하는 거 그만하고 싶어서, 너무 많이 지쳐서, 엄마와 맺은 관계를 반복하기 싫어서 이진과의 이별을 감행한 거다.


다만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다루는 사랑의 실패담이 마지막 두 화를 남기고 급 전개되는 바람에 개연성을 잃은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어떠한 일에든지 함부로 덤비는 진취적인 희도가 좋았던 건데, 갑자기 흐르는 세월 앞에 그리고 미국과 한국 간 물리적인 거리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희도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했을까. 사랑을 다시 쟁취하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그저 6개월 동안 혼자 시름시름 앓다가 이진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시청자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올림픽 금메달까지 땄으면 솔직히 한 두 달 정도는 운동을 쉬어도 괜찮은데, 대체 왜 방에만 짱 박혀 있던 건데?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희도였다면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당장 비행기표를 산 다음 미국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16부작 서사를 서둘러 끝맺었어야 하는 작가의 한계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둘의 관계가 이후에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들의 사랑은 실패로 끝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젊음은 성장을 상징하고, 성장은 결국 어떤 개체가 미숙하다는 걸 전제로 하니깐 말이다. 다 가질 수 있다고 착각했지만, 막상 가져보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희도와 이진이의 미숙함 없이는 ‘청춘’을 논할 수 없다. 희도와 이진이는 터널 앞에서 그간의 설움을 토하고 각자 나름대로의 변명을 하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관계를 끝낸다. 그러고는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다이어리에 솔직한 고백을 끄적여놓는다. 각자의 실수를 인정한 셈이다. 후회로 가득한 이별의 순간을 새로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래도록 희도를 괴롭힌 그 이별의 순간을 희도는 사십이 넘어서, 당시 이진의 마음을 알고 나서야 새로 쓸 수 있었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결국 희도와 이진이가 나눈 사랑의 결말은 자우림이 부른 노래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후렴구 가사 두줄로 요약된다. 시간은 유한하기에 푸릇푸릇한 젊음은 떠나갈 수밖에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희도와 이진이의 결말은 많은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야 했다. 젊은 시절은 곧 실패한 날들, 그럼에도 밝게 웃었던 날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허망하지 않은 젊은 날의 과오

작가는 작품의 기획의도에 “청춘의 이점은 언제나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체력에 있다”라고 말한다. 희도와 이진이의 이별이 비극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다.


9화에서 이진이 희도와 함께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읊었던 대사를 떠올려 본다. “너는 나를 언제나 옳은 곳으로 이끌어”. 서로의 존재만큼이나 서로의 부재 또한 이들을 옳은 곳으로 인도했으리라 믿는다. 성장은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일이라고 했다. 황현산 시인에 따르면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며 간다”.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바람에 머물 수 없고, 어쩌면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과거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다시금 내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실연의 상처를 발판 삼아 각자의 자리에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 둘은 꿈을 이뤘다. 희도는 7년 동안 세계 최정상에서 군림하다 박수를 받으며 왕좌에서 내려왔으며 결혼까지 했다! 이진은 UBS방송국 프라임타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됐다. 비록 첫사랑에는 실패했지만, 직업적 성공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지난날의 기억, 나를 열렬히 응원해줬던, 그리고 어디선가 여전히 응원하고 있을 누군가의 존재가 힘이 됐으리라.


푸를 , 봄 . 이처럼, 푸르렀던 지난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젊은 시절 저금해둔 소중한 기억은 평생 동안 우리의 삶을 밝혀주고 더 나은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일깨워준다.


귓가에 바람이 살랑이는 계절, 봄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와 함께한 봄날이라 더욱 따사로웠다. 이렇게 또 애청하던 작품을 떠나보내지만, 극 중 인물들과 더불어 마음껏 울고 웃던 지난 시간을 연료 삼아 우리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 나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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