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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 Aug 08. 2022

#1 이름에도 향기가 있다면

 봄이 되면 내 코 끝이 기억하는 향기가 있다. 중학교 여자아이임에도 두발 규정보다 훨씬 짧은 머리. 큰 눈. 체육시간에는 구석 언저리에서 지긋이 우리를 바라보고 환히 웃어주기만 했던 아이, 민이. 그 아이에게서는 밭에서 막 따온 미나리 향이 났다. 그 향이 강렬했던 것이었을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따스하고 희미한 그리움이 와닿는 느낌이 들어 가끔 허공에 대고 민이의 이름을 부른 적도 있다. 나는 이름에게도 향기가 있다면 민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은 ‘민이’지만 워낙 체구가 작고 연약한 아이였기에 우린 그 아이에게 ‘미니 미니’라고 불렀고, 민이는 그 별명을 좋아했다. 민이는 어딘가 늘 아파 보였지만 그에 대해 묻는 것을 꺼려하는 아이였기에 자세히 물을 수 없었다.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인생이 모래시계와 같다던 그 아이에게 “어디 아프니? 도와줄까?”라는 말은 선의를 넘어 불편한 무언가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민이가 한 번 학교에 늦게 등교한 적이 있다. 멋쩍은 듯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내게 다가오던 그 순간에도 민이에게는 그 향이 났다. 돌아설 때 은은한 향이 가득 차 그 좁은 중학교 교실 내에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나는 그 향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 궁금했다.

 따분한 수업 시간 중에 창밖을 내다보면 수줍은 개나리가 고개를 들이미는 것을 보았다. 다시 봄이구나. 그 봄의 언저리에 숙제를 명목으로 민이네 집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해가 기어 들어갈 즈음 종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짐을 싸고 나왔다. 그토록 궁금하던 미나리 향의 기원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에 그 아이의 집에 가는 길 내내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 없었다.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이런 길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민이네에 도착했다. 나는 그 순간 그 아이의 입을 통하지 않았지만, 미나리 향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 앞을 가득 채운 미나리 밭. 그리고 굽은 허리로 그 밭에서 미나리를 따며 우리를 맞아주시던 민이네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역시 그분에게도 어딘가 코를 찡하게 울리던 봄 미나리 향이 났던 것이다.

 파랗게 물올라있는 미나리를 캐며 이른 봄맛을 미나리 향으로 먼저 느꼈던 그날부터 봄엔 꽃보다 미나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가녀린 몸 가득히 미나리를 끌어안아 봄 냄새를 맡는다는 민이를 보며 나 또한 그 봄 향기에 취했다. 미나리 향이 진동하는 밭 위에 드러누워 춘삼월의 하늘을 바라본 우린 같은 향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개나리가 예쁘게 피는 다음 봄에 또 함께 미나리를 캐자며 손가락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개나리가 눈치도 없이 노랗게 핀 그다음 해 봄, 나는 민이와 다시는 미나리를 캐러 갈 수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향기로도 채워지지 않는 삶이 있음을 깨달았다. 

“민이가 편히 쉬게 되었다.”

당장 달려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는 너에게서 그 향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너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렇게 너를 피하던 날들의 연속. 이후의 나는 정신없는 나날들에 한참을 치여 참 간사하게 너로부터 멀어졌다. 낮이면 쳇바퀴를 돌리고 밤이면 의무적으로 침대에 몸을 맡기는 일생을 반복했다.

 ‘띠리링-’

 그렇게 인생이 계획된 시간표대로 흘러가 대학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내가 마주하길 피하던 슬픔 아래, 민이네 할머니가 계셨다. 민이의 자리에 한 번 들러보지 않겠냐는 전화였다. 그리곤 뜨거운 여름, 나는 그제야 너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너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고 또 불렀다. 사진 속 환하게 웃는 너를 보며 어쩌면 나를 기다렸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스웠다. 어떻게 이렇게 날이 더운데 민이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로 그날의 미나리 향이 가득한 걸까. 그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향기가 코 끝에 남겨질 때 네가 살며시 내게 밀려왔다. 이름에도 향기가 있는 사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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