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주 Aug 11. 2022

#2 어떤 커피는 달기도 하다

  달면 뱉고 쓰면 삼켰다. 나는 호의로 둔갑한 달콤함의 치사량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보았다. 말랑말랑해진 감정을 틈타 내 목구멍 전체를 점철한 초콜릿은 어떤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 번은 우정, 한 번은 사랑이었고, 그다음은 사람 그 자체였다. 겨우 뱉어보려 했을 때는 이미 하얀 속내까지 점령하여 내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래서 늘 밑바닥부터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무한한 나의 신뢰가 초콜릿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손바닥 위에서 내 인생을 노려보는 콩알만 한 알약들로는 이 달콤한 어둠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어깨를 서로 빼가며 양보해나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사람에게 데인’ 경험 이후 난 꽤 오랫동안 이성을 찾지 못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 나는 그 달기만 한 감정을 사랑으로 부를 수 있는지 헷갈렸다. 깊고 따뜻하고 달고 부드러운 것은 죄다 싫었다. 

  그리고 지난해, 나는 놀랍도록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내뿜는 당신을 마주했다. 스물하나, 살다 보면 눈빛만 봐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감이 생긴다. 돈 버는 대학생으로 일하러 왔던 나와는 달리 입고 온 바지를 들쳐 선한 복사뼈를 드러내면서까지 아이들과 어울리는 그……. 나는 자연스레 함께 있는 자리를 피했다. 따뜻하다 못해 단단한 것도 녹일 것 같은 웃음이, 옷차림이, 발걸음이, 눈빛이 내 목구멍을 부여잡아 괜스레 헛구역질을 불러일으켰다. 삶의 결 자체가 사람 냄새인 이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어디서 왔어요, 이름이 뭐예요 등의 예의를 갖춘 질문에도 나는 괜히 마침표로 끝나는 퉁명스러운 말들로 입술을 삐죽이며 무마해 왔다.

  이러한 내 거친 감정들은 때론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번은 센터 내에서 독서 골든벨 대회가 열렸다. 어린 나무들이 작은 도서관 문지방이 닳도록 이용하여 그간 쌓아온 지식을 뽐낼 시간이었다.

  “동화책 『관계』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도토리가 좌절에 빠졌을 때 낙엽이 관계에 대해 말을 했어요. 관계란 무엇이라고 설명했나요? 그리고 낙엽을 돕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말했나요?”

  아이들은 저마다 손을 들고 말했다.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뜻이라고 했어요. 도토리가 살아남아서 갈참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내가 살아남는 게 남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그런 와중에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아차, 싶어 입을 턱 막고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대회가 끝날 무렵 단조로운 공간 속 지루한 하품이 난무할 즈음, 그가 다가와 자신의 검지를 내보이며 반짝이는 무언가를 건넸다. 그리곤 아이들이 쓰고 남은 스티커 판 위에 그걸 붙였다. 이건 우리 거예요. 그날부로 영문 모르는 스티커 모으기 작전이 시작되었고 나는 이 우스꽝스러운 일상에 스며들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함께 센터에 나와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를 할 때마다 스티커를 하나씩 모으는 일. 구미가 당기기는커녕 헛웃음만 났다. 내 할 일이나 하자 싶었는데 날마다 와서는 오늘은 책 정리했으니까, 오늘은 환경 구성했으니까 하며 그 판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그 스티커 수만큼 아이들과 그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채워지는 스티커마다 왜 얻은 것인지 네임펜으로 아래에 진하게 쓰자고 의견을 내보았다. 그 작은 스티커들이 봄바람 부는 날엔 화분을 심을 것을 부추기더니 8월의 어느 날 아이들 물놀이까지 계획하게 했다. 쌀쌀해지면 노을을 닮은 단풍잎을 주워와 센터를 꾸밀 생각을 했고, 옷깃을 여며야 했을 때는 우리의 건의로 작은 도서관 앞에 겨울 색을 닮은 책갈피 코너가 만들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스티커 판은 온통 각자의 빛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나는 반짝이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분명 남인데, 그들의 이름을 한없이 어루만지다가 나의 온도는 그 공간의 색이 되었다. 그리고 계절의 향연이 센터를 덮어 물들 때 즈음 내가 처음 입고 온 활동 조끼에는 어쩐지 깊고 따뜻하고 달고 부드러운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이제야 사람을 다시 미더워하기 시작했는데 그날의 스티커 판은 비어 있었다. 그분은 취업반이었는데 지원했던 회사에서 연락을 받아 허둥지둥 정리했다고 한다. 내 자리에 남겨진 쪽지 한 개. “스티커 판 다 채워졌으니 이제 따뜻함에 익숙해져 보는 게 어때요.”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큼 소리를 내며 시큰한 눈 밑과 함께 밀어 넣었다.

  당신은 나비처럼 그렇게 큰 날갯짓으로 불쑥 나타났다가 훨훨 자유로이 날아갔다. 쓰디쓴 새카만 어둠 속에서 하나둘 걸음마로 날 이끌어 준 당신을 이젠 닿지 않는 희미한 빛으로 기억한다. 가슴이 찌르르했다. 이런 걸 아쉬움이라고 하나. 당신을 닮은 나비 한 마리는 매일 그렇게 내 주위를 맴돈다. 우리가 매번 함께 오갔던 버스 정류장에서 이 낯선 감정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먼지 쌓인 기억을 훌훌 털고 보니 벌거벗은 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문득 평소에 입도 안 대는 쓴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근처 카페에서 당신과는 너무 다른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시럽 때문인가, 달다. 인상을 잔뜩 쓰면서도 그 쓴 게 달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니까 애써 한 번 더 믿고 싶어졌다. 달았는데, 삼켰다.

작가의 이전글 #1 이름에도 향기가 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