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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전 Dec 26. 2023

답장 미루기

 오랜만에 글을 쓸 마음으로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죠. 한 시간 정도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다 안경을 다시 썼어요. 밀린 카톡과 DM도 보내고요. 방 청소도 하고 빨래도 정리하고 모든 걸 마치고 노트북에 앉았는데 뭔가 두려워서 담배도 피우고 왔죠. 그리고 이제 씁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는데 제 글을 기다린 사람은 없겠죠? (ㅋㅋ) 너무 바빴어요. 온갖 과제와 시험, 발표, 몇 차례의 술자리를 지나 드디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갑자기 찰스 부코스키가 말이 생각나네요. 종이와 펜, 자기만의 방만 있으면 언제나 글을 쓸 수 있다, 다른 건 핑계다.. 

 솔직히 그동안 글을 정말 한 편도 쓸 수 없었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죠. 그런데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게 뭔가 밀린 메시지들에 답장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렵고 막막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답장할 것들은 쌓이는데 그럼 더 도망치게 되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던데. 글을 써야 제 혼란스러운 마음에 답을 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끊긴지 오래인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낼 땐, 뭐라 보낼지 고민하다 대뜸 이렇게 말하죠. "잘 지내니?" 어색하기 그지없는 인사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별 수 있겠습니까. 어설프게라도 상대를 향한 그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표현할 문장이 없는걸요.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다시 글을 써보려고요.


-

 얼마 전, 실제 기업과 함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기획하고 발표할 기회가 생겼어요. 팀과 함께 멋진 광고 전략을 찾아내고 구체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기획의 구조를 만드는 작업(백지 PPT를 만든다고 합니다 ), 그리고 실제 발표를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PPT의 디자인이나 세부 디테일은 변화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방향성과 메시지는 제가 직접 만들었죠.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깊이 파고든 건 좋으나 해결책이 명확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른 팀이 멋지게 발표하고 칭찬받는 모습을 보며, 분하고 아쉬웠습니다. 시험 때문에 바쁜데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리고 난 이게 먹힐 거라 생각했는데. 저의 부족함을 실감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서러워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내장탕 한 그릇 먹었죠. 

 자신감으로 넘쳤던 과거가 후회되었어요. 저에게 아직 좋은 눈이 없다는 것을 깨닫았죠. 기획을 잘 만들어 가려면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 좋은 구조와 나쁜 구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둘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히 떨어졌습니다. 뭘 모르니 자신감에 넘쳤던 것이고. 근본적인 인사이트 부족이 해결이 안 된 상태니 열심히 해도 부족했습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가 생각났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실력이 뛰어난 난 사람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별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될 때까지 해 봅시다.


 제 MBTI는 원래 INFP인데, 점점 INTP으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MBTI가 과학이 아니니 신빙성이 없다니 하지만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떠들어 보죠. F와 T의 차이는 뭘까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T는 데이터와 사실에 입각해 추론하고, 논리를 중요하고, 어떤 체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고, 감정적인 반응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F는 다른 이들의 기분을 신경 쓰고, 다른 이들과 조화롭게 지내는 걸 중요시하고, 감정에서 우러나는 결정을 좋아하고, 공감을 잘한다고 합니다. 요즘 여자친구가 제가 공감능력을 잃은 것 같다 말하던데, 저는 그 말에도 공감을 못했습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무엇이 저를 변하게 만드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더욱 흥미로운 건, MBTI가 고정된 것이 아닌 계속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변에서도 자신의 MBTI가 과거와 다르게 변했다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격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타고난 기질은 있겠지만, 그 기질의 범위 밖에서 무궁무진한 변화가 가능하겠죠. 어쩌면 성격이란 타고난 기질과 그날의 컨디션, 주변 환경의 영향과 신체적인 스트레스 정도가 짬뽕된 애매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MBTI는 성격을 설명하기 딱이죠. 애매하기 그지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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