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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Aug 10. 2020

그때의 실패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주체적으로 살자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때가.

그 전에는 공부보다는 오히려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좋았던 아이였다. 초등학생이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하겠냐마는 그때에도 치맛바람이 셌던 동네라 수학, 영어 과외를 비롯해 속셈학원, 웅변학원, 서예학원 등등 아이들은 많은 학원을 다녔고, 삼삼오오 모여 독서모임이니 논술과외니 하는 것들도 더러 했었다(물론 지금의 아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지만). 나도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속셈학원보다는 미술학원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고 땅따먹기나 편 먹고 이어달리기, 고무줄놀이 등을 하며 노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할 중학교가 정해지면 반 배치를 위해 배치고사라는 것을 쳤었다(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한 반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 다양한 성적대의 학생들을 고르게 배치하기 위해 쳤던 시험이다. 배치고사를 잘 치면 처음부터 선생님들에게 '공부 잘하는 학생'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배치고사를 잘 치르기 위해 공부하는 애들(이라 쓰고 공부시키는 엄마들이라 읽음)도 있었다. 나는 성적에도 안 들어가는 시험이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엄마도 나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아서 하나도 공부를 하지 않은 채로 배치고사를 봤는데, 역시 점수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반이 정해진 후 만난 담임선생님이 나를 별로 달갑게 대해주지 않았던 걸 보면.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은 유난히 공부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대놓고 차별하는 사람이었다. 학부모 면담을 다녀온 엄마도 그것을 느꼈는지 썰렁했던 담임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 그런 차별을 처음 겪어본 나는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시험을 잘 쳐야겠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공부해 정말로 전교에서 3등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후 담임의 나를 대하는 태도는 180도 변했고 나는 졸지에 모범생 대접을 받게 되었다. 우스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통쾌하기도 했던 것 같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향한 선생님들의 애정과 지지를 체득한 이후, 나는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 병'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모범적인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입시를 코 앞에 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 중요한 고등학생 때 우리 집은 아빠의 직장때문에 이사를 했고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 무려 강남 8학군으로.

엄마, 아빠는 이사를 가기 전부터 나에게 겁을 줬다.

"그곳 애들은 진짜 공부를 잘한다."

"애들이 새침해서 친구 만들기도 힘들 거다."

"공부 못 하면 너를 얕볼 거다." 등등

긴장을 바짝 하고 친 첫 시험에서 운이 좋게 나는 반에서 1등을 했고 이후에는 전교 1등도 몇 차례 했다. 부모님 때문에 엄청 쫄았던 나는 그 덕분에 서울의 교육 1번지라는 강남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좋은 친구들도 만나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역시 선생님들도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공부를 잘하면 나 스스로도 물론 기분이 좋고 뿌듯했지만, 나를 대하는 주변의 방식이나 태도가 썩 만족스러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인정 욕구가 매우 컸던 시기였다.



화려했던 고등학교 성적표를 뒤로 하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에는 그야말로 날고 긴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생이 된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남보다 더 빨리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부모님께 “이것 보세요. 해냈어요.” 하며 자랑스런 결과물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듯 그때의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음만 앞서서, 사법시험 1차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렇게 만만한 시험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는 금방 붙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쉽게 생각하고 본 두 번의 시험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 많이 위축되었던 것 같다. 아직 제대로 된 시작은 하기도 전인데 말이다.

그 후 휴학을 하고 동기들과 같이 학교 고시반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1차에 붙었으나 이후 두 번의 2차에서 낙방하며 나는 ‘이 길이 나의 길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시절을 짧게 요약했지만 20대의 초중반은 나에게 너무나 시련이었고(그전까지는 인생이 나름 생각대로 잘 풀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어떻게 그 시련을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가 나에게 너무 큰 숙제로 느껴졌었다. 엄마는 가장 꽃다운 저 때 내가 너무 공부와 시험 준비에만 몰두해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해 아직도 안타까워하신다.


힘들었던 그때 그시절



사법시험 2차에 떨어진 이후 1년 동안 방황했다. 처음에는 창피하기도 했고 나에게 실망했고 ‘그것만 잘 썼더라면’ 자책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신을 차린 후 알바도 해보고 회사에서 인턴도 해보고 관심이 있던, 법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학원에 기웃거려도 보았다. 그때는 도저히 다시 또 같은 책을 펴서 같은 공부를 할 수 없겠더라.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부모님이랑 상의도 해 보고 내 내면의 소리에 귀도 기울여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이나 주위의 기대를 의식하지 않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이람. 내 인생은 내 것인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나에 의한 결정.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결국 내가 잘하는 것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법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렇게 나는 로스쿨에 입학했다.



떠밀리듯 한 결정이 아닌 내가 스스로 깊게 고민한 후 내린 결정이어서 그런지 처음부터 마음가짐이 달랐다. 공부도, 학교생활도, 힘들었지만 대학교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 성적도 더 잘 나왔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치열하게 보내고 마침내 자격증을 땄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방황과 시련도 모두 좋은 추억이다.

바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또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주변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며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까, 내가 더 앞서 나가야 하는데 두려워하며 불안하게 살고 있진 않을까.

그때의 실패가 내 안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도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동안 미디어는 지나치게 발전했고 sns는 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속속들이 비춘다. 손바닥만 한 휴대폰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의 소식도 몇 초만에 알 수 있는 시대다. 쉼 없이 공부를 해 온 인생이라 그런지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친구나 선배들이 뭘 준비한다, 배운다 하면 나도 해야 하나 싶고 그렇다.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심호흡 크게 하고 눈을 안으로 돌려서 나를 바라보려 노력한다.

나에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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