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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Aug 30. 2020

낭만적이지 않았던 신혼과 그 후의 일상 2

오랜만에 들여다 본 일기

2018. 9. 15.

어제는 처음으로 집 근처 산책로를 걸었다. 날씨가 선선해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강아지들도 참 많았는데, 우리 아기들이 생각나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동안 쳐다봤다.


승아(가명)랑 연락을 했다.

언젠가 내가 알려준 '브런치'의 '악아'라는 닉네임의 작가가 쓴 글들을 모두 읽어 보았다며 말을 걸어왔다.

'브런치'는 일반인이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상의 공간인데, '악아'는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규민(가명)이가 알려줘서 그 후로 나도 찾아보게 되었다(브런치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여기 적혀 있었다ㅎㅎ).

글을 참 재밌고 맛깔나게 써서 나까지 마음이 후련해 지는 글들이 많았다.

주로 결혼 후에 느끼는 감정들, 시집 사람들과의 마찰, 살아가는 모습 등이 글의 주제였는데, 공감 가는 내용도 많고 나이도 나와 같아서(86년 호랑이띠) 한 번 씩 생각날 때면 찾아서 읽곤 했었다(그땐 나도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지).

승아한테도 알려줬는데 최근에 다 읽어본 모양이었다.

정말 시월드는 그러냐며 물어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번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나를 떠올렸다는 말을 했다.

승아는 나의 요즘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한 명이라 악아의 최근 글이 궁금해졌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즘 내 모습에서부터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까지, 너무나 흡사하여 악아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내 기분이 울적한 것도, 울적한 기분에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이 없어지는 것도, 그와 말을 섞기 싫은 것도, 다툼이 잦아지는 것도...이 모든 것이 저녁마다 혼밥을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된 그 끈끈한 결합의 느낌을 가져보고 싶어 결혼을 했는데, 혼자 살 때보다 더 외로운 아이러니라니.

설상가상으로 동생과 조이마저 내 곁에서 사라져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부류라고 생각했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혼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소중했고, 친구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활발한 성격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할 일도 없을 것이고, 혼자만의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며, 심심할 때면 서초동을 찾아가 데이트 기분을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하지만 점점 울적한 기분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혼자일 때의 외로움과 둘일 때의 외로움은 천지 차이였다.

혼자 먹는 밥은 제대로 된 식사일리 없었고 맛도 없었다. 점점 식욕과 입맛을 잃게 되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울었고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사소한 말투에, 가치관의 차이에, 무심한 태도에 나는 더욱 혼자인듯한 느낌을 받았고 둘이 있어도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일이라도 없었다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2018. 9. 20.

글을 잘 쓰고 싶어 연습 삼아 일기를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이젠 감정의 배출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친구랑 한바탕 수다를 떨면 스트레스가 날아가듯, 마음 속의 말들을 활자로 뱉어놓으면 뭔가 후련해지는 느낌이랄까.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기도.

다른 사람들도 그래서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르지.


어젠 그림을 그렸다.

오래 전부터 스케치만 해 두고 그리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갑자기 많아져버린 여유 시간이 붓을 들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다른 잡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영화도 봤다.

케이트 베킨세일이 나오는 법정드라마였는데 나쁘지 않았다. 예쁜 여주인공이 나와서 더 재밌었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운동하러 나가기가 애매해져서 씻고 티비를 조금 보다가 잠을 자러 침실로 들어갔다.


누워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웠는데, 12시쯤 됐으려나.

삐삐 소리가 나더니 그가 들어왔다. 다른 날보다 조금 빨리 왔나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자는 척을 하게 되더라.

조금 웃겼는데...또 조금 슬펐다.

이젠 얼굴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나. 불편해져버렸나.

그래도 집에 도착했음을 알고 잠에 드니 중간에 잠에서 깨는 일은 없었다.

내가 먼저 잠에 드는 날에는 옆에서 기척이 느껴지면 중간에 깨곤 했다.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게 신경쓰여서 깊게 잠을 못 자고 있다가 작은 소리라도 날라치면 깨는 것이었다. 한 번 잠에 들면 도통 깨는 법이 없는 딥슬리퍼였는데. 나도 아주 무딘 편에 속하진 않나보다.


쇼윈도부부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어도 이해하진 못했다.

그럴거면 이혼하지 같이 왜 살아.

이제는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만 타들어간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뭐 먹을지 고민해 봐야겠군.




이 후에도 몇 개의 일기가 더 있었는데, 추석에 임박하여 가부장적인 명절 문화의 부조리함에 대한 소회를 적은 일기를 끝으로 더 이상의 글은 없었다. 그 해 추석을 어떻게 보냈더라? 솔직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 후에 일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럭저럭 잘 보내고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나보다. 저 때가 제일 상황이 좋지 않았던 때인 것 같다.

그 후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며 안정을 찾아가는 듯 하다가 내가 임신을 했고, 임신 후에도 여전히 과다 업무로 인한 그의 부재로 외로움에 힘들어하다가 출산 무렵 다행히 남편이 이직에 성공하여 드디어 길고 긴 고독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일기를 다시 보니 생각보다 심각했었구나 싶다가도 저 시기를 그래도 버텼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양가의 도움없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둘이 함께하기에 버틸 만하다.

한 명이 아기를 보면 한 명은 식사를 준비하고, 한 명이 씼기면 한 명은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같이 집안일을 하고 같이 이유식을 만든다. 주말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만들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의 움직임에 같이 기뻐한다.  가끔씩은 서로에게 자유시간을 내어 주며 취미나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외롭고 낭만적이지 않았던 신혼에 비해 지금은 퍽 안정을 찾은 느낌이다.

빠르지는 않지만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를 바라보며 둘이 함께 조금씩 나아가는 일상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믿는다. 앞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있겠지만 함께 잘 헤쳐나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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