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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Aug 19. 2020

낭만적이지 않았던 신혼과 그 후의 일상 1

오랜만에 들여다 본 일기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



결혼을 이렇게 적절하게 정의한 문장이 또 있을까.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나의 신혼은 우울과 외로움으로 버무려져 있다. 무엇보다 낭만적이어야 할 신혼 때 정작 나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꽤 오랫동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학교 기숙사에 살며 2년 동안을 거의 딱 붙어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넘게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집안일부터 시작해서 경제권 문제, 사소한 습관, 명절을 대하는 태도 등 사사건건 부딪혔다. 지금은 서로에게 맞춰진 부분도 있고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것도 있지만, 그때는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서로의 모습에 실망하며 상대에게 날을 세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화마저 단절되었다. 남편은 당시 일이 넘쳐나는 로펌에 다니고 있을 때라 하루에 얼굴 보는 시간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주말부부보다 사정이 열악했다. 그 펌에 다니는 변호사들 중 상당수가 탈모로 고생하고 있었고 어떤 분은 암이 발병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 했으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직하는 변호사도 수두룩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고 보면 되겠다. 얼굴 볼 기회가 없다는 핑계로 더욱 입을 닫게 되었다.

불만은 계속 쌓여가는데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일기를 썼다.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찾을 정보가 있어 휴대폰 메모장을 둘러보다가 저 당시 썼던 일기를 보게 되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지금보니 내가 속이 좀 좁았었나 싶다가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다.  

그때의 일기를 몇 개 브런치에 기록해 두려 한다.




2018. 9. 11.

코끝을 간질이는 쌀랑한 바람.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해 주는,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아침 공기가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요사이 몇 주는 우울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보통 생각할 것이 많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몸도 그것을 느끼는지 아침에 배 상태가 좋지 않다.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오늘 또 좋지 않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좋지 않은 결말에 도달하기를 반복한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나는 점점 더 우울한 바다 속으로 침전하는 느낌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을 한다.

너와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고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가치관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오래 만났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건 큰 착각이었나보다.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생각,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결국 입을 닫아버리는 걸 선택한 우리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먼저 입을 열 용기는 없다.


지루하고 지겨운 갈등의 연속이다.

같이 있어도 마주보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에 맞장구쳐 주지 않고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도 즐기지 못하는 시간들이 외롭다. 또 눈물이 흐른다.

행복하려고 한 결혼 서약이 우리에게 족쇄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답을 말할 수 없는 물음표만 계속 머릿속에 떠다닌다. 누가 좀 알려주면 좋을텐데.


오늘 또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운동을 가고 혼자 시간을 보내다 시간이 되면 잠에 들겠지.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자기계발계획을 세우고 혼자 하루를 살아간다.


분담했던 집안일은 할 줄 알았다. 말하기 싫어 계속 지켜보았다.

알고서도 안하는 건지, 정말 안 보이는 건지 궁금하더라.

그건 시간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의 문제다.

집에 없는 시간이 많으니 본인으로부터 나오는 쓰레기는 없을 거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같이 사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부터는 책을 정리할 책장이 필요해도, 커튼이 없어 아침마다 눈이 부시고 옷 갈아입을 때마다 신경이 쓰여도, 매트리스를 거실에서 치우고 싶어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냥 이대로 살지 뭐.

그리고 계속 머리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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