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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Oct 13. 2021

아무리 좋은 시부모님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올해도 무탈하게 추석연휴가 지나갔다.

결혼과 함께 시작되는 명절을 둘러싼 갈등이 나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추석, 남편의 큰집에 갔을 때 목도했던 모습은 익히 알고있는 가부장제의 전형이었다.

큰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분주히 전날 만들어 놓은 각종 제사음식을 다시 데우고 과일을 깎고 또 어떤 음식들은 만들기를 하셨고, 큰아버지 포함 남자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안방에서 서로 말없이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나에게 처음이니 보고만 있으라고 하셨던가,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하셨던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위와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고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마음이 불편한 채로 남편을 쫓아다니며 눈치를 살폈다.

사실 말씀은 저리 하셔도 내가 알아서 소매를 걷어부치고 뭐라도 하리라 기대(?)하셨을 수도 있는데, 나라는 사람 자체가 애초에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부장적 풍습과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알러지가 있는터라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음식들을 제사상에 부지런히 나르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한 여자들은 뒷편으로 밀려나고 이제껏 앉아있던 남자들이 앞으로 나와서 절을 했다.

나는 신기하고 어딘가 불편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기독교 집안인 우리집은 우리끼리 간단하게 음식을 차린 후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명절을 보내서 그런지, 이런 모습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으나 실제로 맞닥뜨리니 어쩐지 거북했다.

첫 명절은 그렇게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것으로 지나갔다.


설날이 다가왔다.

저번엔 추석 당일 시부모님 댁에 갔던터라 이번에는 설날 당일 내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이를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데 웬걸?

우리집은 제사를 안드리고 본인 집은 제사를 드리니 당일에는 본인 집으로 갔으면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되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뜻밖의 반응이라 좀 놀랐지만 나는 '번갈아 가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니냐, 지난 추석과 같은 제사라면 나는 가고싶지 않고 가서 아무 일도 안한다 해도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스트레스다'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남편은 여자들의 노동과 희생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적 제사 문화와 결혼 후 여자에게 프레임 씌워진 구시대적이고 불공평한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그렇다고 믿는다), 굳이 본인이 나서서 그러한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이어져왔던 풍습을 갑자기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 같았다.

남편은 내가 조금 불편해도 현실과 어느정도 타협하며 그럭저럭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나대로 남편에게 실망했고, 머리속으로 납득되지 않고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는데 웃는 얼굴로 제사에 참석할 수는 없다는 뜻을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내 부모님마저 나의 이런 생각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유별난 것이라 치부하며 전통적 방식에 순응하길 바라셔서 당시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알고보니 이 때 임신 초기였다는..ㅠ).

어찌저찌 남편이 시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우리는 큰집 제사에 가지 않고 그 해 설날을 보냈고, 그 후로 나의 임신과 출산, 코로나 등 해프닝이 줄줄이 이어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제사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남편과는 갈등이 있었지만 시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제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신 적은 없었다. 남편이 어떻게 말씀드렸는지는 몰라도 내가 종교적 이유로 제사를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알고 계신 것 같다.

나에게 제사를 강요하지 않고 내가 불편해 할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는 것, 시부모님댁에 방문했을 때 내가 편안히 지내다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 등  여러가지 것들에 감사를 드린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사랑하는 아들, 즉 남편과 내가 싸우지 않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리라.

어쨌거나 지금껏 고부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시부모님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식자랑'이 그것이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길어 각 2박 3일씩을 보냈다.

시부모님댁에 갔을 때다.

오랜만에 꿀댕이를 만난 시부모님은 훌쩍 큰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운지 연신 꿀댕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이제 막 두돌을 맞이한 꿀댕이는 제법 말도 할 줄 알고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도 피우고 자기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시부모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꿀댕이의 요즘 일과, 하는 행동 등에 대해 말하던 중 아버님이 그러셨다.


지 아빠가 똑똑하니까 똑똑할거야!


?? 순간 나 혼자 좀 벙쪘다. ㅋㅋ

나도 남편 못지않게 똑똑하고 똑같은 변호사인데 굳이 내 앞에서 아빠가 똑똑하니까 꿀댕이가 똑똑할거라니...

만약 내 부모님이었다면, 남편 앞에서 내가 똑똑하니까 꿀댕이가 똑똑할거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오히려 아빠가 똑똑하니까 똑똑할거라고 남편을 치켜세워줬을지언정.

확실히 시부모님은 내 앞에서 본인들 자식자랑에 거리낌이 없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남편 쪽 친척분이 꿀댕이를 보고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그러셨다.

"두상이 완전 아빠네. 뒷통수가 톡 튀어나온게. 코는 엄마 영판이다."

아직 어려서(크면서 콧대가 살아날 거라 믿는다ㅋㅋ) 코가 낮은 꿀댕이보고 코는 영판 엄마라니,,, 아니 나도 두상 예쁘고 머리 좋을 것 같아 보이는 동그란 앞이마는 완전 나를 그대로 빼다 박았고 초롱초롱 총기있는 까만 눈동자도 내 어릴 적 모습과 똑닮았는데, 다른 건 쏙 빼놓고 코만 나를 닮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좋은건 다 아빠닮고 못생긴건 나를 닮은걸로 보이나.

기분이 나빴지만 뭐, '시'월드는 어쩔 수 없는 뭔가가 있나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평등과 공정, 상식과 합리, 이 당연한 가치들이 당연하게 지켜지는 사회가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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