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안 되겠니?
오랜만에 회식에 갔던 남편이 10시도 전에 집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왔냐 물으니 1차만 하고 왔단다. 치킨을 먹는 중에 맥주 두 모금을 마셨더니 갑자기 너무 졸려서 하품이 계속 나왔고, 이를 본 옆사람들이 요새 육아로 많이 피곤한가 보다며 어서 들어가라 했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남편은 육아 때문이 아니라(뭐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 맥주 두 모금 때문에 하품을 한 건데요? 네, 두 잔이 아니라 두 모금이요..."
말해주고 싶었다. 회사 사람들도 남편이 술을 잘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맥주 두 모금에 잠이 쏟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렇다. 남편에겐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애석하게도 없다.
물론 술을 못 마심으로 인한 순기능-위의 사례처럼 회식에서 빨리 자리를 뜰 수 있다든지, 불필요한 회식에 동원되지 않는다든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거나 사고 칠 위험이 없다든지-도 상당히 많다. 술값으로 나가는 돈이 제일 아깝다던데, 그 점에 있어서는 매우 바람직하다. 나는 남편이 회식이 있거나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고 잠만 잘 잔다. 연락도 잘 되거니와 너무나 멀쩡히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에(그 옛날 아빠가 술 마시고 밤늦게 연락이 안 되면 엄마랑 동생이랑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던 것과는 너무나 상반됨).
내가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냐~ 그것은 또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술을 잘 마셔야 회사생활 편하게 한다'는 류의 말과 그러한 직장문화를 경멸한다.
그래도 가끔씩은 남편과 함께 술 한 잔 앞에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나 아주 안 좋을 때, 왠지 분위기에 취하고 싶을 때, 진지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을 때, 꿀댕이가 잠든 후 부부만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등 술이 몹시 필요한 날에도 남편과 함께 "쨘!!" 하며 술잔을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조금 속상하다. 물론 남편이 분위기를 맞춰주며 본인 앞에 한 잔 따라놓을 수는 있겠지만 몇 번 입에 댔다가 내려놓기 일쑤이고 그 기분 좋을 만큼 마신 뒤의 알딸딸~할 때의 약간 몽롱하면서도 나른한!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이런 아쉬움을 토로하면 남편이 레파토리처럼 하는 말이 있다.
"유재석도 술을 한 잔도 못 마신대!!"
ㅋㅋㅋ 아...네...알겠습니다. 유재석만큼 돈 많이 벌어오세요?? 화이팅!!!
연애할 때부터 남편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된다며 술 마시기를 꺼려했다. 얼굴만 빨개지는 것이 아니라 배도 아프고 머리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랬다.
그래도 연애 초반에는 어떻게든 남편의 알코올 분해능력을 길러보고자 노력했는데, 한 번은 만난 지 1년이 되던 날이었나. 우리는 차를 빌려 드라이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마지막 코스로 분위기를 잡으며 샴페인을 터뜨리고는 몇 잔을 홀짝였다. 달달해서 마시기에 별로 부담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숙사 문이 닫히는 시간에 맞춰 학교로 돌아가야 해서 우리는 조금 급하게 샴페인을 마셨는데, 결국 한 병을 비우지 못하고 반 정도만 마셨다. 그 반도 내가 더 많이 마셨으니 사실 남편이 마신 샴페인의 양은 결코 많지 않았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학교로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출발한 지 10분이 채 됐을까. 차가 움직이니 속이 울렁울렁거렸는지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토할 것 같다며 차를 세워달라고 기사님께 다급히 소리쳤다. 차가 서자마자 남편은 문을 열고 튀어나가서 속에 있는 것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는데, 누가 보면 대낮부터 술을 마셔 고주망태가 된 사람으로 오해하기 딱이었다.
저... 정말? 이 정도야???
그 뒤론 이 능력은 기른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 또르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술을 마실 법한 상황에 맛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알코올 분해효소가 부족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DNA 손상 위험이 4배나 높다고 하며 DNA의 영구적 손상은 암을 유발한다고 한다. 남편에게 술은 독약인 셈이다.
우리 둘만의 오붓한 술자리는 앞으로도 잘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둘만의 커피브레이크나 피자타임(남편은 피자광이다)은 종종 오래도록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로 눈 맞추고 오늘과 내일의 일상을 공유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웃고 떠드는 그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아! 꿀댕이가 술을 잘 마실 것인가는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 결론을 알게되기까지 아직은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시부모님은 모두 술을 못 하시고, 친정부모님 특히 우리 아빠는 술을 매우 잘 드시며 내 동생들도 모두 알코올 분해능력이 뛰어나다. 과연 어느 피를 물려받았을지 매우 궁금!!
꿀댕이랑은 술 한 잔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