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둘째는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여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아들이 있다.
연애할 때나 아들을 낳기 전과는 확실히 사랑의 모양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너무 재밌고 좋다. 이제 의사표현도 제법 하고 점점 이쁜 짓을 많이 하는 아들은 너무 귀여워서 볼따구를 마구마구 깨물어주고 싶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다.
"여자한테는 진짜 딸이 있어야 돼."
"아이고, 아들이야? 아들 다 소용없어~ 딸이 최고야." (이건 심지어 아들만 둘이라는 교수님께서 하신 말이다)
"아들은 결국 아빠 편이더라고~ 엄마한텐 딸이 필요해."
"엄마 생각해 주는 건 딸밖에 없어~" 등등등...
본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인 건지 어디서 그렇다고 들어서 그러는 건지... 왜 이렇게 딸 타령들이지?
난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고 결심했는데, 자꾸 이런 말을 들으니 진짜 딸 하나는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사실 나도 임신을 확인하고 딸이었음 내심 바랐다.
뼈대가 얇고 보기보다 약골인 내가 골격부터 여자아기와는 다르다는 남자아기를 잘 케어할 자신이 없었고(이건 정말 맞는 말이다.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한 손으로 커피를 드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멋있어 보이길래 따라 했다가 몇 날 며칠 근육통으로 고생했다.), 옷 좋아하고 예쁜 것을 좋아해서 딸이 생기면 누구보다 깜찍하게 꾸며주고 싶기도 했고, 자기 닮은 딸과 같은 옷을 입고 찍은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너무 좋아 보이고 부러웠고, 아들보다는 동성인 딸이 나와 더 끈끈한 유대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은연중에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와 내 여동생,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엄마에겐 역시 딸이 있어야 했다.
엄마와 나는 정말 친하다. 거기에다 여동생까지 더해지면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최고의 조합이다.
엄마는 소녀감성인 데다 감정적이고, 그에 반해 나는 다소 무뚝뚝하며 이성적이다. 동생은 어쩔 땐 엄마랑 비슷하고 어쩔 땐 나랑 비슷한데, 아무튼 동생은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하여 소처럼 버릴 것이 없다.
우리는 체형도 비슷하고 발 사이즈도 같아서 한 옷을 돌려가며 입기도 하고 같은 옷을 세 벌 사서 나눠 입기도 한다. 엄마는 부산에 살고 나와 동생은 서울에 살지만 양 끝으로 떨어져 살고 있는데, 서로의 집에 놀러 갈 때에는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는 옷이랑 신발을 신고 거기 있는 화장품을 바른다. 엄마는 우리끼리 얘기지만 패션감각이 웬만한 2-30대 못지않아서 딸들인 나와 여동생보다 더 예쁘고 세련된 옷들이 옷장에 가득하다. 오랜만에 부산에 가면 엄마 옷장을 열어보고 못 보던 예쁜 옷을 발견한 후 입어보는데, 어쩌다 엄마 마음이 동하면 내꺼가 될 수도 있다! 엄마는 우리에게 백도 주고 악세서리도 주고 많은 것들을 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다. 나는 내 엄마 같은 엄마는 되기 힘들 것 같다.
떨어져 살고 있어 한 번 모이기 어렵지만 어쩌다 세 명이 모이면 수다 수다가 끝을 모른다. 와인 한 병, 치즈, 과자 등을 앞에 놓고 새벽이 되도록 수다 꽃을 피운다. 옛날 얘기, 회사 얘기, 집안 얘기, 여동생 연애 얘기, 내 아들 얘기... 주제가 넘치고 넘친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을 여기에서만은 할 수 있다. 하소연을 하는 성토장이 되었다가 고민을 털어놓는 상담센터가 되었다가.
셋 중 두 명이 다투기라도 하면 나머지 한 명에게 전화해 본인의 입장에 대해 토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며 본인의 입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한다. 이때 나머지 한 명은 상당히 곤란하고 난처함... 그렇지만 각각에게 맞장구쳐주며 중재를 시도한다.
엄마는 가끔씩 너무 예민해서 걱정거리가 있거나 생각이 너무 많으면 잠을 잘 못 이루는데, 그러면 우리에게 전화해서 한바탕 이야기를 한 후 안정을 찾곤 한다(거의 내가 엄마의 정신건강 담당).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결혼하기 전 2017년에 추석 연휴를 껴서 15일 정도 엄마, 나, 여동생, 셋이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여행한 적이 있다. 중간중간 소도시 들러 구경하고 하룻밤씩 자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몇 밤 잔 후 다시 LA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여동생과 둘이서는 여러 차례 여행을 했지만 엄마까지 셋이서 하는 해외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운전 잘하고 겁도 없는 동생이 렌터카로 하루 종일 미국 고속도로를 달렸다(뭘 몰랐기에 가능한 거였다). 운전 못 하는 나는 제일 편하게 뒷자리에 앉아 반은 수다에 동참하고 반은 꾸벅꾸벅 졸았다(동생아 고마워!!).
밤이 되면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집에서 셋이 둘러앉아 또 수다 꽃을 피웠다.
그때 갔던 샌프란시스코는 너무 이뻤다. 수국이 만발한 롬바르드 스트릿, 금문교 베스트 포토존, 소살리토, 예쁘고 비싼 집이 줄지어 서있던 painted ladies... 샌프란시스코는 언덕길이 많았는데, 경사가 너무 높아 차가 뒤집힐 것만 같았던 오르막길에서 엄마가 얼굴을 들지 못한 채로 "악" 소리를 지를 때 우리는 너무 웃겨서 진짜 배꼽을 잡고 깔깔깔 웃었다. 영어 잘하는 여동생이 거의 모든 통역을 담당해 엄마랑 나는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운전과 통역은 동생이, 계산은 엄마가,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물론 나도 뭔가 역할을 했겠지만 잘 기억나진 않는군.
아무튼 편하고 맛있고 재밌고 아름다웠던 여행이었다. 우리 셋이 뭉치면 지구 어디라도 가지 못 할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같은 모녀와 둘도 없는 친구인 자매. 두 관계를 모두 가진 내가 뱃속의 아기가 딸이길 원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꿀댕이는 아들이었다. 처음 알고 난 후 약간의 실망감이 있었지만 아들이어서 좋은 점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며 잘생긴 남자 아이돌을 보면서 태교를 하곤 했다(저렇게만 자라준다면야!).
낳고 보니 성별을 떠나 꿀댕이는 그 자체만으로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귀여운 꼬물이가 눈을 꼼빡꼼빡거리며 내 손가락을 힘주어 잡을 때, 아들인지 딸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인생 10개월차, 꿀댕이는 커 가면서도 우리에게 너무 많은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반씩 닮은 신기하고도 귀여운 얼굴을 하고 나를 보며 윙크를 할 때는 세상 모든 근심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이 이런 거구나 싶기도 하다. 자식들은 태어나서 3년 동안 부모에게 평생 할 효도를 한다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지금은 꿀댕이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꿀댕이를 잘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에게 둘째란 옵션은 없었다. 친구들이 옆에서 "다들 그렇게 말해도 둘째 낳더라. 첫째가 혼자 노는 거 보면 짠하대~ 다시 신생아 보고 싶기도 하구!" 라고 말할 때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가끔씩 슬쩍슬쩍 여자아기를 보면 눈이 가기는 한다. 그런데 둘째를 갖는다고 해도 딸이라는 보장이 없잖아? 인터넷에서 떠도는 '딸 낳는 방법'에 대해 검색도 해 보았지만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ㅎㅎㅎ
어서 빨리 동생이 딸을 낳으면 좋겠다. 내 딸처럼 이뻐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러기엔 동생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 ㅠㅋㅋㅋ
남편은 처음부터 아들이길 바랐다. 같이 축구하고, 야구장 가고, 뭐 그런 공놀이를 아들과 같이 하는 로망이 있는 듯. 좋겠다. 그 로망 실현할 수 있게 돼서.
나도 개미지옥이라는 해외직구로 옷 사다 나르면서 아들 패피로 만드는 재미에 빠졌다. 통장이 거덜 나긴 하겠지만 당분간 못 빠져나올 듯싶다. 나중엔 아들 팔짱 끼고 같이 쇼핑하며 데이트하는 날이 오겠지. 내 로망도 실현할 수 있길.
바쁘겠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