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특성상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의 사건을 시시때때로 들여다본다.
그 사건은, 때로는 근로를 하고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각종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를 입고는 그 손해배상을 구하는 일이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며, 또 때로는 사이가 소원해져 연락조차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친자녀에게 부양료를 구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며, 그들 나름의 법률적인 문제가 그러한 사정에 내제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사건사고에 개입해서, 그들의 삶의 단면을 제3자의 눈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 마냥 흥미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마치 배우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또 그것을 통해 깨닫는 바가 있기도 했다.
일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라든지, 사회적 약자의 어려운 상황 등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이 보다 입체적으로 바뀌었달까.
너무 교과서적인 표현인가.
그러다가 어떤 때는 너무 피로해졌다.
나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직업으로 가져서 이렇게 하나도 모르는 남의 인생을 알 수밖에 없게 되고 또 그들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면서 피곤하게 사는지.
안 그래도 극I성향인, 사람과의 관계맺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내가 말이다.
뭐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고 일 자체는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니 성향에 맞는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떤 때는 정말 하기 싫은 사건도 있다.
그런 사건은 대부분 소송상대방과의 법정공방이 격하다거나 사건내용이 복잡한 사건이라기보다, 내 의뢰인과의 관계가 불편한 사건들이다.
손해배상청구 사건들의 의뢰자들이 그런 경우가 잦았다.
최근 나를 특히 힘들게 한 사건 두 건도 생각해보면 다 손해배상사건이었다.
그 중 하나는 학폭피해 사건이었는데, 피해학생의 법정대리인, 그러니까 학생의 어머니가 진짜 너무 연락을 자주 하셨다. 와 정말 스토킹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
학교폭력사건 자체로만 보면 그 어머니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이혼 후 혼자서 힘들게 키워 온 아들이 7~8명의 아이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서 피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응급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어머니의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가해 학생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고, 그 부모들에게까지 최대한의 배상을 받아내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소송이 그리 빨리 진행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피고의 수가 많아서 주소를 일일이 알아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고 소장이 각 송달되는데 까지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전화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도 그렇지만 같은 말을 계속 듣는 것도 너무 지치는 일이다.
학생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나의 사건검색' 페이지를 들어가서 진행상황을 검색해보시는 것 같았다.
송달은 어떻게 되는거냐, 폐문부재는 뭐고 수취인불명은 뭐냐, 기일은 언제 잡히냐, 우리 아들은 아직도 정신과를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다, 우리 아들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냐, 변호사님도 자녀가 있지 않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 것 같냐, 다른 사건도 많겠지만 잘 좀 부탁드린다...
반복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가 한 번 씩 추임새도 넣다가 그렇게 10분, 20분, 통화를 하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진이 빠졌다.
나중엔 전화번호 뒷자리를 외우게 되었고 벨소리가 울릴 때 그 뒷자리가 뜨면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한 번 조정이 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가해자가 많다보니 의견일치도 힘들어 몇 명과는 또 법정으로..
선고 이후 집행이 완료되기까지 (선고 이후의 일은 원래 내 업무범위가 아닌데) 진짜 너무 많이 전화를 하시는 통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던 케이스였다.
이 정도면 그 분의 일상도 정상적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건은 변호사에게 맡겨놓고 본인의 일상을 사는 것이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변호사를 이렇게 쪼아대면 사건을 더 열심히 봐 줄 것이라 생각하는걸까.
물론 진상이라는 판단이 서면 조심을 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더 열심을 다해 봐주고 진심을 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오히려 사라진다.
나도 사람인지라 나를 힘들게하면 하기 싫어지는 법.
위 사건이 끝나고 와 이제 끝났네..속이 후련했는데 더 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 의뢰인은 그래도 전화를 많이 하는 정도였지 막말을 하는 분은 아니었는데, 이 사건의 의뢰인은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했다.
사건내용도 정말 지저분했는데, 할 말은 많지만 짧게 요약하면 사실혼 관계였던 남편과 그 부모를 상대로 모욕, 폭행, 상해 등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건이었다.
심지어 그 남편과는 성폭행..등으로 현재 진행 중인 형사사건, 둘 사이 태어난 아이의 양육권과 친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가사사건도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서로 감정이 좋지 않겠나.
의뢰인 본인이 써 온 진술서하며, 바리바리 가져 온 증거자료들(서로 나눈 문자폭탄들, 상해 사진들, 신고내역들, 지인들의 확인서..)을 보면 "정말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는게 이런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생각에 나름 신경써서 자료를 검토하고 의뢰인의 진술을 많이 반영해 서면을 썼다. 그런데 의뢰인의 요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건을 변호사에게 맡겼으면 변호사를 믿고 그 의견대로 따라야 하는데, 본인이 주장하는 내용이나 제출했으면 하는 증거를 주장, 제출해 주기를 심하게 요구했다.
아니 그럴거면 본인이 하지 왜?
법률적으로 의미없는 주장이나 오히려 불필요한 증거들을 제출해 달라고 부탁하면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며 왜 제출하지 않는 것이 좋은지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통하지 않으니 제출해 줄 수밖에 없다.
손해배상사건은 위자료 청구하는게 거의 다고, 위자료는 감액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나중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기가 제출해 달라는 거 안 제출해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 아니냐? 할 수 있기 때문에 제출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또 재판부도 별로인 것이 참..이런 것이 머피의 법칙인가.
서면보고 대충 의뢰인이 주장해달라고 했겠거니..하고 판단해보겠다 하면 되겠구만, 굳이 상대방 변호사도 있고 뒤에 방청객들 잔뜩 있는 앞에서 이런 주장 왜 한거냐고,, 굳이굳이 쪽을 줘야 하겠냔 말이지.
그러면 진짜 딱 그 사건 하기가 싫어진다.
한 번은 기일에 휴가를 내야 할 사정이 있어, 어차피 결심만 구하면 되는 마지막 기일이라 사무실 다른 변호사님께 기일 출석을 대신 부탁드렸는데, 그걸 알고는 왜 자기 사건 기일인데 휴가를 낸 거냐고 길길이 뛰는 것 아닌가.
소송수행을 태만히 했다나 뭐라나.
나중에는 진짜 이 분과 전화할 때면 심장이 콩닥거리고 혈압이 솓구치는 느낌.
정신적 고통이 상당했다.
이것 말고도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는데...더 쓰면 손만 아프고 속만 상하지.
과정이야 어떻든 다행히 청구취지에 근접하게 선고가 되었다.
양 측 모두 항소하지 않은게 천만다행.
물론 대부분의 사건들은 이렇지 않다.
오히려 상대방 이의에 대한 반박이나 증거제출을 위해 연락을 하면 안 받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의뢰인이 너무 연락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다들 본인 현생을 사는 것도 바쁜데.
그러다가 사건이 끝나면 간혹 전화하여 감사하다. 그 동안 고생하셨다. 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런 인사를 받으면 힘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힘든 사건은 몇 개 없어서 그런가 잘 잊히지 않는다.
기분나쁜 일은 잘 잊어버리는 성격임에도 이런거보면, 성격 예민한 사람들은 이 일 못하지 싶다.
일 하다가 주저리주저리 하소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