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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ul 15. 2019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언제나 돌아보면 '어리고 어리석어'


"나의 결정이 소년의 최선이길"


판사 메이는 인정받는 판사로서 바쁜 삶을 산다. 남편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져 가정생활은 위기를 맞고 있고, 가정의 스트레스가 사무실에서도 이어지지만 사사로운 감정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떠나 공정한 판결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날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백혈병 환자인 애덤의 케이스를 맡게 되는데,  메이는 이례적으로 애덤을 만나 애덤이 정말 스스로의 의지로 수혈을 거부하는 것인지를 들어보려고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신체와 달리 애덤은 생동감 넘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였다. 막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애덤은 '샐리 가든'을 연주하고, 메이는 틀린 코드를 짚어주며 함께 노래를 부른다.  

"제 선택이에요."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판결한다면 어떻겠니?"

"판사님이 참견쟁이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겠죠."


애덤을 만나고 돌아온 메이는 판결문을 쓴다. 메이는 "소년에게 앞으로 다가올 삶과 사랑을 고려할 때"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아동법(The Children Act)에 따라 법정은 아동의 종교적 신념보다 생명이 더 우선한다고 보고, 병원이 아동에게 필요한 치료를 하는데에 반드시 필요한 수혈을 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애덤은 병에서 회복되어 부모의 편협한 시선 밖에 있는 세상으로 처음 걸어 나오게 된다. 애덤은 생명을 얻은 것에 대해 기뻐하며 세상을 맞지만, 새 삶을 얻고 종교적 신념을 버리게 되면서 부모님과 갈등을 빚게 된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에 바라보고 가야 할 표지판을 잃은 애덤은 무작정 메이를 찾아오고, 메이는 직업윤리에 따라 애덤을 차갑게 돌려보낸다. 애덤에게 죽음의 문턱에서 처음 본 외부 세상 사람인 메이는 구원자였을 것이다. 병실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천사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잘 알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안내도 해줬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오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껍질을 깨고 나와 자유의 세상에서 가장 처음 본 엄마 오리의 외면에 세상 잃은 심정. 따라갈 사람 없이 드넓게 펼쳐진, 아름답고 막막한 세상.

#오리둥절 ���


아기 오리 애덤은 점차 맹목적으로 메이의 동선을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가 약간 스릴러로 변하는가 싶지만 곧 이언 매큐언 특유의 '세상에서 가장 격하게 억울하고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애덤의 병은 재발하고,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죽어간다. 메이는 애덤이 위독하여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덤을 찾아 "다가올 삶과 사랑을 생각해봐. 함께 배도 타고 세계일주를 하며 이야기도 나눠야지."라고 설득한다.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우리는 주어진 시간, 그때 내 상태(바쁨의 정도나 정신연령, 마음의 깊이)에 따라 보이는 만큼의 상황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을 어쩌겠는가. 그때는 몰랐는데.


삶에는 그래서 기쁨만큼 슬픔이 가득하고 떠올리면 미안함과 회한으로 대해야 하는 얼굴이 누구에게나 있다. 회한 문학의 대가(...) 이언 매큐언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나무에서 풀이 자나라는 것처럼 쉬운 일이에요. 어리고 어리석어, 나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기울어진 어깨에 흰 손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삶을 쉽게 생각해요, 강둑에서 풀이 자라듯 쉬운 일이에요. 그러나 나는 어리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눈물로 가득 찼습니다”


예이츠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노래인 '샐리 가든'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삶에서 사랑했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디테일들, 다 지나가고 난 후 나중에야 조각조각 발견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 왜 그때는 다 보이지 않을까. 빠르게 달려가며 지나치는 작은 풀잎처럼.  

나이가 지긋해지고 연륜이 쌓여도 삶은 한치 앞도 알 수 없어, 그 상황에 주어진 만큼만의 정보를 갖고 예측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나에게 쏟은 상대방의 진심을 지나가고 나서야 속속들이 아는 경우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메이는 바쁜 일상과 그만큼의 마음 씀 때문에 나중에야 기차에서 읽다 접어둔 애덤의 편지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애가 원했던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것,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건 ‘의미’였어.”

매 순간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누고, 변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삶을 컨트롤할 수 없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삶의 시간 동안 생각이 계속해서 변할 미성년 소년은 생명을 얻은 후 나중에 다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인생의 시계가 달라서 나의 배려가 그에게 고통이 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때는 그렇게 될 줄 잘 몰랐더라도, 그 순간 갖는 '의미'를 나누며 살 수 있다. 우리 중 누가 그 시간의 메이가 되어 판결을 내려야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고, 책임과 회한도 피할 수 없다. 다만 애덤에게 이 순간의 이 세상과 이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조금 더 잘, 다른 방법으로 말해줄 순 있겠지.



뜬금없이 임형주에게 감사하다. 영화의 의미를 다 축약해서 담고 있는 상징적인 노래인데 어릴 때 임형주 버전으로 듣고 너무 좋아서 가사도 외웠기 때문에 애덤이 전주만 코드 틀리게 튕길 때부터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있었다. ㅋㅋㅋㅋㅋ


엠마 톰슨의 우아한 연기가 이 영화를 완성한다. 영화에 진정성을 불어넣는 것도,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도 엠마 톰슨이다. 법정 안에 들어가기 전에 초조해하지만 판결문을 낭독할 때는 단호하다. "나 바람피울 것 같아"라며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 부부관계 회복에 성의를 쏟고 있는 남편과 있지만, 아무 대사 없는데도 애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눈빛이다. 그리고 우아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워서 영화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인생이 우리 뜻과 다르게 흘러갔다고 하더라도, 내 본의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의 책임감과 속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르게끔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우리는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메이가 법정에서 샴쌍둥이 분리수술 판결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고, 메이와 우리의 사적인 삶 속에서도 그렇다.

"나의 결정이 소년의 최선이길"

결정은 그 시점에서의 최선이지만 그것이 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때의 최선을 다하지만 인생은 하나를 넣었다고 하나가 나오는 예측 가능한 게임이 아니니까. 결과적으로 긴 시간 속에서 볼 때 우리는 인생의 인과관계에 생각보다 큰 주도성이나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선택 자체는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최종적인 결과를 주도적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But I was young and foolish", 우리는 언제나 뒤돌아보면 그 당시에 “어리고 어리석어" 알 수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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