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 거짓말이라는 커다란 괴물
최우수 미니시리즈상을 포함, 에미상 1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올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HBO 드라마 <체르노빌(Chernobyl)>. 8월 14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국내 단독 공개되었다. 어머 이건 꼭 봐야 함 퀄리티.
https://m.youtube.com/watch?v=IEI0WaqtHCA&browser_open_type=external&feature=youtu.be
[줄거리]
1986년 4월 26일, 소련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발생한다. 정부는 끔찍한 방사능 피해 사실을 부정하고 은폐하며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사고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번져간다.
거짓말이라는 괴물: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What is the cost of lies?)?"
체르노빌 사고는 명백한 인재였고, 바이오 로봇(사람)들을 비롯, 많은 시민들이 위험 노출을 불사하면서도 괴물의 몸뚱이가 커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아 희생의 확산을 최소화했다. 괴물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우리는 진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고 또 하다가, 진실이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만다.”-발레리 레가소프의 극 중 대사
사람의 역사에서는, 아무리 큰 사건이더라도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대했던 사람의 태도와 사건의 정의가 더 중요하다. 모든 사람의 사건은 사람이 정의 내린 대로 인식되고 그것이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거짓말들은 더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위험의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통에 노출되며 목숨을 건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마저 더럽혔다. 누가 진짜 괴물일까?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순진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밝히는 일에 집중하다가, 진실을 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잊고 만다. 그러나 진실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선택하든 눈을 돌려 외면하든, 언제나 반드시 존재한다. 진실은 우리의 필요와 바람, 체제와 이데올로기, 종교에 관심이 없다. 진실은 언제나 저 뒤에 버티고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이 교훈은 체르노빌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나는 한때 진실의 대가가 두려웠으나, 이제는 묻고 싶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To be a scientist is to be naive. We are so focused on our search for truth, we fail to consider how few actually want us to find it. But it is always there, whether we can see it or not, whether we choose to or not. The truth doesn't care about our needs or wants. It doesn't care about our governments, our ideologies, our religions. It will lie in wait, for all time. And this, at last, is the gift of Chernobyl. Where I once would fear the cost of truth, now I only ask: What is the cost of lies?"
-발레리 레가소프의 극 중 마지막 독백
[역사가 스포일러이지만 드라마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1:23:45
1986년 4월 26일 01:23:45. 1시 23분 45초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2년 뒤 같은 시각, 원자로 결함 은폐를 폭로하고 나머지 원자로 결함을 보수할 것을 주장하던 발레리 레가소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집요하게 이어져 온 KGB의 감시를 피해 마지막 증언을 녹음한 테이프를 남긴 뒤다. 현실은 얼마나 소설보다 기이하고 극적인가.
"입에서 금속 맛 나지 않아?"
그래서 인위적으로 극적 장치를 넣은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이 드라마는 5회분 내내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웬만한 호러 영화보다 무섭고, 다음 편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와, 이 드라마 너무 재미있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호러 영화보다도 무서운 이유는 이 드라마가 실제로 벌어졌던(그리고 진행 중인) 끔찍한 사고에 기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얼마든지 또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986년에 벌어졌던 이 사건은 2019년 현재에도 고스란히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약 30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늦게 대처하거나 고의로 사고를 은폐하여 더 많은 희생을 야기하는 일은 또 벌어질 것이고, 그나마 당시 체제라서 가능했던 일사불란한 뒷수습마저 이제는 없을지 모른다. "알 필요가 없으니까" 알려주지 않아 무지한 와중에도 제 몫의 책임을 해내려다 큰 변을 당하는 시민들의 희생도 또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 편히 볼 수 없는 드라마다.
중요한(?) 사람들이 저지르고 은폐한 사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막아낸 대참사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늘 그래 왔어. 언젠가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지."
"과학자는 많습니다. 누구든 저를 대신할 수 있었어요. 장관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조달해 주었습니다. 인력. 자재. 월면 로봇도요. 말만 잘 듣는 바보들 중, 실수로 좋은 사람 한 명을 보낸 거죠. 아아, 보리스, 이 일에서 당신만큼 중요했던 사람은 없어요."
"진실은 우리의 필요와 바람, 체제와 이데올로기, 종교에 관심이 없다"
직접 목격되지 않고 소문만 무성한 미지의 대상은 두려움이라는 촉매를 안고 실제보다 더 몸집이 큰 괴물로 왜곡되고는 한다. 구소련이라는 미지의 괴물이 존재하던 시절 체르노빌 사고는, 물론 사고 자체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라고 해도 무방할 사고였지만, 미친 소련인들의 폭주쯤으로 괴담과 함께 선정적으로 거론되어 왔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겠지만 최근 한국에 갑상선 진단을 받는 환자들이 급증한 것도 체르노빌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드라마는 자극적이거나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억지로 잘잘못을 따져들며 강요하지 않는다. 사고 발생 직후 관련인들의 대처(사고를 야기한 테스트의 총책임자 아나톨리 댜틀로프가 "흑연은 없어! 네가 못 봤으니까!"라고 우겨대던 모습, 사고 보고를 받은 후 첫마디가 "누가 또 알아?" 였던 체르노빌 발전소의 소장), 거짓과 은폐로 놓쳐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어서 체제가 은폐하려는 진실을 양심적으로 밝히고자 했던 사람들에 주목하고, "핏줄에 희생이 흐르고 있어 모든 세대가 제 몫의 희생을 안고 가야 하는" 소련인들이 어떻게 체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는지 덤덤히 이야기한다.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비극적인 사고였지만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 드라마에서 차분히 나열하는 이 사건의 경위를 직시하고 배워야 한다. 불가능할 것이라던 사고가 어떤 경위로 발생했는지, 매뉴얼대로 대처한 관련인들의 행동이("we did everything right." 우리는 실수한 거 없어.) 왜 비극으로 치달았는지. 체제에 저항하여 목소리를 내던 양심적인 과학자들과,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제 몫을 다하던 당시의 시민들이 얼마나 제각기 최악의 비극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했는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괴물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인재는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사도인 제18 사도가 왜 릴림(인간)이었는지, 그 위엄을 참 잘 보여준다. 신이 된 인간은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인용), 지구 상에 출연했던 생물 중 유일하게 스스로를 완벽하게 멸종케 할 수 있는 기술까지 갖추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지금 전례 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앞으로 올 몇십 년 동안 우리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 또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대가는 인류 자체의 소멸이 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유발 노아 하라리, 저서 <호모데우스> 서문 중에서
괴물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유통기한 100년의 차폐막 저 너머에 결박되어.
거짓말이라는 괴물은 우리 도처 어디에나 있으며, 비슷한 사고가 벌어지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