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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Aug 23. 2019

이타미 준의 바다

삶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아시안 최초로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늘 한국을 그리워했으며,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건축에는 자연의 야성미와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한다.” -이타미 준


유동룡의 빛과 그림자. 


하루 해가 뜨고 지며 만들어 내는 빛과 그림자, 

하루 중의 시시 때때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계속 다르게 보이며 자연스럽게 나이 먹는 건축물. 자연과 추억의 재료로 지어낸 집. 




유동룡의 건축은 거칠고 따뜻하다. 영화에서 언급되기도 하지만, 매끈매끈 반듯하기만 한 건축과는 차별되게 시간을 품을수록 멋스러워진다. 사람이 만질수록 점점 닳아서 망가지거나, 곱게 모셔야 하는 미관용 건축이 아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며 머무는 사람의 추억을 머금고 시간 속에서 멋지게 나이 드는 건축물이라니.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제 꿈이고 철학입니다.”

-이타미 준


유동룡은 “흔히 사람들이 건축이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건축은 소재이다”라고 말한다. 

예술은 만든 사람의 가치관, 보고 자란 것, 정체성과 밀접하다. 소재와 재료에 얽힌 사람의 추억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생활이나 커리어상의 불편은 감수하는 사람. 때로 차별받았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 서러움이 있었겠지만 끝내 타국으로 귀화하지 않았으며, 흔한 스토리 팔이 피플들과 달리 고생했다고 여기저기 구구절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담백한 사람. 좋은 사람이 좋은 집을 만든다는 생각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한다. 유동룡의 건축물은 자연과 닮았고, 건축가 자신과도 닮았다.  


지인들은 그가 마음에 어둠을 담고 있었지만, 그늘 속에서 여러 형태로 존재하는 빛을 보는 눈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심미안에 대한 이야기이겠지만, 비유로서의 그늘,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슬픔과 어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과 타인,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더 깊이,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사물을 더 깊이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도 남보다 더 많이 느끼며 살 수 있지만, 그만큼 남들이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는 아픈 진실도 더 많이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세세하게 공감하여 슬픔을 느껴야 한다. 어둠과 슬픔을 잘 알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어루만질 수 있었던 건축가. 그것은 예술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사람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다. 유한하기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는 미의식이 생겨난다. 미의식의 근저에는 비애, 슬픔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이타미 준, 딸 유이화가 엮은 저서 <손의 흔적> 중에서



<돌 박물관> 드로잉

                       

"내 건축 작업에서 ‘글과 드로잉’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건축을 재조명하려는
저항시의 서곡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도공의 마음 같이 무심으로 건축해야 한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은 얼마나 중요한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집, 환경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한다. 건축가의 신체는 결과물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평소 행실이나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했던 이타미 준. 자신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기보다, 원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겸허했던 건축가. 


영화에서 조금 재미있었던 포인트는, 방주교회 착공 후 매일매일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설계를 바꾸는 유동룡의 요구를 “딸이라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웃으며 소회 하던 장녀 유이화 건축가의 인터뷰. 


       

다큐의 한 장면


“거의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시대적 유행의 영향을 받아 스타일을 능숙하게 변화해간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또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교직에 몸을 담는다. 그리고 갖가지 위원직을 맡고 나이에 걸맞은 간판을 달고 포장을 한다. 작품은 거의 스태프들에게 맡기고 작품 이외의 분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건축가를 사람들은 ‘대선생님’이라 부르지만 작가로서는 사실 종언을 맞이한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사는 요령이 별로 없었던 이타미 선생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운 좋게’ 유혹받지 않은 채 작품에 몰두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 시게루, <손의 흔적> 중에서


본업 이외의 것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농담을 섞어서는 '제 앞가림 하나 못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본업 능력이 진실하지 못하거나 자기 능력 밖으로 다른 욕심이 많거나 할수록 제 앞가림을 잘하고 본업 외 처세가 발달하여 역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이타미 준의 지나온 삶,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해 온 정성을 다해 바치는 헌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욕심이 과하다 싶은 연출도 엿보이기는 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다 보면 울컥하거나 찡한 부분이 많은데, 그것이 영화적 장치들 때문이라기보다는 직업과 세상을 대하는 이타미 준의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결같은 태도를 증언하는 동료 및 가족들의 진심 어린 사랑과 존경, 그리움. 


중간중간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작위적인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며, 건축 다큐임에도 방주교회를 비롯한 여러 건축물들의 실제 가장 아름다운 요소들이 영상에 충분히 못 담겨서 아쉽기도 하다. 인터뷰는 한국어 듣기 평가 수준으로 문장에 집중하지 않으면 절반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정제되지 않은 인터뷰 답변이 자막 없이 나온다. 어떤 인터뷰이는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아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내용을 놓친다. 몰라서 그랬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어떤 의도가 있어서 일부러 자막을 넣지 않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다. 외국인이 인터뷰이로 등장할 때는 자막이 나오므로, 긴장을 늦추고 안도하게 된다. 즙 짜내는 감성(이라고 하고 나는 모지리니까 펑펑 울었음)도 좀 있는 편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닌데, 건축가의 가족과 지인들이 마음을 다해 응한 것만으로, 존경을 담아 건축가의 가치관을 다루려는 의도와 마음 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기는 하다. 아직 아무도 이타미 준의 업적을 영화로 다룬 적이 없으니까. 굳이 만듦새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내 주제를 매우 넘어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성덕 입성에 성공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포도호텔과 수풍석 박물관이었다. 포도호텔은 이타미 준 건축의 집약체이다. 헬스장이니 인위적인 산책로니, 편의시설도 그리 없이 제주의 자연과 제주 그 자체를 담아낸 곳. 파격적인 단층으로 된 호텔 로비에서는 진짜로 은은하게 포도향이 났고 포도알 하나 공간만큼의 방에서는 다른 방이 보이지 않게, (아파트처럼 나란한 구조가 아니라 포도송이처럼 불규칙한 구조인데도 바로 옆 방이든 먼 방이든 서로 테라스에 나와 있어도 서로 안 보임) 세심하게 설계돼 있어서 처음 갔을 때는 적잖이 충격 비슷하게 받았다. 디자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머무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고, 자연스럽게 풍광에 녹아드는 건축물이었다. 인간의 오만이나 자본주의의 천박한 면은 배제하고 겸허한 본연의 아름다움과 배려만 남은 휴식공간 같았던 곳. 


포도호텔


수풍석 박물관은 아직 한 번도 비 오는 날 가보지 못해서, 스크린 가득 비 오는 물 박물관을 본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물 박물관에는 이타미 준이 직접 고르고 만든 돌이 벤치처럼 놓여있다. 영화에서 아이는 물속의 돌을 주워 바깥에 쌓아 놓는다. 절대 손 대면 안 되고 멀리서 봐야 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마음껏 앉고 만지는 흔적까지 박물관의 일부가 되는 곳이다. 하루 해가 넘어가며 물 바닥에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빛, 그 속에 내가 직접 들어가서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작품이 되도록 고려해서 설계한 곳이다.   


물 박물관
바람 박물관


바람이 전시의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풍 박물관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 사이사이로 흐르는 바람의 소리, 빛과 바람을 맞으며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는 나무는 참 아름다웠다.


돌 박물관


경주 타워가 이타미 준 디자인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지금껏 이타미 준의 모든 건축물에 감탄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재작년에 경주 가보고 경주타워 봤을 때는 조금 흠칫하기는 했다. 가운데 비어 있는 석탑 실루엣 공간 부분으로 산과 들판, 경주의 자연이 내다 보이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건물이 너무 투박하고 이타미 준과는 거리가 먼 졸부 스타일이었다. 구청 어르신들 같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한껏 힘주고 멋 부려 지은 것 같은 스타일인데 철학은 없고 디테일은 투박하고 그런 느낌. 모티브만 어설프게 표절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지적재산 훔치는 도둑놈들아 베끼려면 그 정수를 똑바로 베낄 줄이라도 알란 말이다.  


건축가의 생전 모습


다큐는 파스텔빛으로 노을 지는 청초한 제주의 바다에 담기는 최백호의 음성과 함께 끝난다. 사실 이타미 준과 바다를 굳이 연결 짓는 제목과 콘셉트도 약간 의아한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스크린에 가득한 바다를 보면서 슬픈 장면이 크게 없는 영화임에도 울컥했다. 영화에 담긴 것들이 눈물 날 만큼 아름다웠나 보다. 건축물이 아름다워서인지 건축가가 아름다워서인지,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므로 그 둘은 어차피 유기적인 것이라 차이가 없는 건지 어쨌든 그랬다.   



[바다 끝 - 최백호]                          

먼 아주 멀리 있는 

저 바다 끝보다 까마득한 그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을 두고 오자 


푸른 바람만 부는 

만남도 이별도 의미 없는 그곳에 

구름처럼 무심한 네 맘을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짙은 어둠만 남은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그곳에 

물결처럼 춤추던 

너와 나를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면 

난 우리를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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