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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Oct 12. 2020

'아론 소킨 답다'가 최고의 찬사

10월 16일 넷플릭스 공개되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아론 소킨의 첫 연출작 <몰리스 게임>을 보고 약간 과한 연출에 당황했었는데, 이 영화의 발랄한 오프닝을 보고도 약간의 불안에 잠겼다. 다행히 우려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영화의 톤은 아론 소킨이 늘 작업해오던 감독이나 배우들의 스타일과 위화감이 없었다. 연출은 데이빗 핀처한테 맡기라고! 하던 불만도 잠식시킬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뉴스룸 시즌3 결말과 몰리스 게임으로 약간 약해질 뻔한 오랜 팬심을 다시 챙길 수 있는 영화였다. 훈남 보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캐스팅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력 때문에 잠잠한 영화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라고 쓰고 초반 5분 정도, 팬심 때문에 퇴근하고 개봉일에 보러 가서 그런지 졸았다고 읽는다. 아론 소킨의 영화나 드라마는 원래 도입부 대사들이 가장 재미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긴 복도를 걸으며 캐릭터의 성향과 그동안의 사건을 정리해주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뉴스룸 시즌3 쯤, 작가의 페르소나인 윌이 진보 꼰대(하지만 윌은 공화당 지지자이다)로 보이고 매킨지와 윌이 격앙되고 빠르며 긴 대사를 하기 시작하면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지고, 짐과 메기가 즈그들 마음 즈그들이 모르고(뭐 쉽게 알 수 있는 게 자기 맘인가 싶기는 하다) 온갖 주변에 민폐 끼칠 때 즈음 모든 똑똑한 인간을 감 떨어지게 하는 세월의 깡패력에 슬픔이 찾아왔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아직 형형하게 살아있는 아론 소킨의 총기와 감에 리스펙이 찾아온다. 다행이다. 알라뷰.  



세계사 안 배운 세대라(핑계) 미국 근대사야 영화나 드라마들로 본 게 전부고 시카고는 도우가 두터운 미국식 피자랑 뮤지컬밖에 모르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한 1968년에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었고,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1968년이 오죽 흉흉했으면 달 상공을 나는 데 성공하고 온 아폴로 8호에 시민들이 보내온 축하 전보에는 "당신들이 1968년을 구했다"라는 문구도 있었다. 아무튼 평화롭게 시작된 베트남전 반전 시위는 폭력시위로 바뀌었고, 같으면서도 각기 다른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들 중 일곱 명의 청년들이 폭력시위 선동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7명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흑인 피고 보비 실에게 법정에서 대놓고 가해지는 인종차별을 비롯, 보수적인 검찰과 판사는 답을 짜고 정해놓은 불공정 재판을 이끌어간다.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의 확산과 대선 시즌 시기적절한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약자 인권의 시간은 종종 거꾸로 흐르니까. 동성애, 인종차별, 여성인권과 같이 그저 인류 공통의 보편적 상식 문제일 것만 같은 일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문맥으로 정치적 편 가르기에 이용된다. 



실화이니만큼 극적인 역전 한 방 대신 짤막한 대사 한 방으로 가슴을 가격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배우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에디 레드메인의 힘없는 듯 힘 있는 듯 적략적인듯 실은 이기적인듯한 입체적 캐릭터 표현이 좋았다. 덤덤하고 칙칙하고 시크한 톤으로 극을 이끌다 결정적 사이다 한 방 정도는 준비해두는 아론 소킨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자신 다운 톤을 유지하는 게 가장 큰 칭찬이 될 수 있는 이름값을 가진 것 역시 존경할만하다. 


조카 앞에서 농치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삼촌처럼 멋있던 램지 클라크도 짧게 등장했지만 마이클 키튼의 포스가 넉넉했고, 가진 성향과 무관하게 원칙을 중시하는 신보수세대를 대변한 조셉 고든 레빗의 연기도 좋았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에 건의를 하고, 고인 앞에 경의는 표할 것이라는 청년 검사의 태도는 뻔하지만 희망적이다. 법정 진술 중에조차 음유시인 같던 사샤 배런 코언도 인상적이었고, 요즘 스필버그가 사랑하는 마크 라이언스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 아프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이 영화 역시 뻔한 공식으로 흐르지만, 언제나 이야기에 차별성을 부여하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 작가의 관찰력, 디테일, 한 마디 한 마디 정제해서 넣는 짧고 울림 있는 대사들일 것 같다. 10월 16일에 넷플릭스에도 공개된다고 하니, 재관람하며 사이다 명대사들을 곱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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