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넷플릭스 뒷북 정주행
<나의 아저씨>, 뒷북 시청하고 인생 드라마 된 이야기
TVN 드라마 톤은 가끔 유난히 칙칙하다. <미생>도 그랬고 <나의 아저씨>도 그랬다. 두 작품의 연출자가 같다는 것을 알고는 '오' 하기도 했다. 그 칙칙한 톤과 폭력과 우울함 같은 것을 마음의 준비 없이 보기가 힘들 것 같아, 분명 좋아할 것 같은 드라마임에도 숙제처럼 미뤄온 <나의 아저씨>를 넷플릭스로 뒤늦게 정주행 한 후기.
매회 눈물 버튼 드라마였던 것 같다. 사람 사는 게 뭐 뻔하기도 하고 감정선이 취향에 잘 맞아 그런지 복선(?) 비슷한 부분이 어떻게 풀릴지나, 1초 후 나올 대사나 장면의 추측은 굉장히 많이 다 했지만, 그 예측 가능한 평범함 때문에 정말 치유받는 느낌으로 16화 모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1화부터 16화까지 집중해서 본 드라마는 정말 드물어서.
(약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낯설고 닮은 사람
낯설고 닮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보다 더 큰 위로를 줄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로 전달하려고 해도 상황을 재단하려는 태도나 가치관의 차이로 왜곡되고 마는 본질을, 닮은 사람들끼리는 그리 많은 말 없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겪고 있을 때 가까운 사람들은 기대치를 가지는 만큼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2차 상처를 주기도 하니까. "네가 너무 민감한 것 아니야?" "너 ~~ 해서 ~~ 한 거지(실제와 전혀 다른 자기 가치관 하의 추측)?" "도대체 왜 그랬어?" "네가 ~~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불행하겠다" "나도 그랬는데 좀 더 노력해 봐" "그래도 00보단 낫잖아" 등의 불필요한 말들로 말이다.
주인공을 매우 극단적인 상황(정당방위였지만 범죄 경력이 있다거나, 빚쟁이에게 맞는다거나)으로 묘사한 것도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의 양을 무심코 재단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 아픔이라면 왜 저렇게 엄살을 부리냐는 말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 살면서 우리는 "쟤는 멘탈이 약해" 류의 말을 의외로 쉽게 내뱉는다. 하지만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다르고, 강하고 약한 맷집의 분야는 다를 것이다. 어쩜 저렇게......라는 말이 절로 머금어지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저마다 적응하고 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아저씨>.
그리하여 굳이 캐묻지 않고,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
경위도 사유도 묻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닥여주는 것.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진심으로 배려하며 말해줄 수 있는 것.
캐묻지 않고 굳이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나와 닮은 저 사람이라면 그랬을 텐데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에 잘 보이는 것들. 보여서 내 일처럼 아픈 것들. 그래서 마음에서 우러나와 나에게 말하듯 위로한다.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신뢰라는 건 그 사람이 어떤 기행을 해도 저 사람은 이유가 있어서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을 믿는 것이다.
"나는 네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너를 믿는다"라고 말해주는 사람. 내게도 부모님 제외하고 두 세 명 더 있었다(제가 사람을 죽인 건 아니고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에 대한 그 타인의 확신이 서럽고 자책감 드는 어떤 순간이 올 때는 도움이 된다.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내가 인식하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알아봐 주고 어떤 때는 나보다 더 나를 인정해줄 때, 외부의 의미 없는 소음들은 딱히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 연대와 위로의 확장이, 몸만 자라 현대를 사는 어른인 우리에게는 제가끔 절실하다.
어른이 없는 시대를 산다
어른이 없는 시대를 산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기도 하고, 어른이 어른 구실을 하기에 모든 것이 빨리 변하기도 하고, 아무도 어른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 행세를 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철회되지 않을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을 받은 경험은 사람을 단단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엔 그런 절대적 사랑과 믿음이 부모님으로부터 오고, 어린 시절의 이 경험은 성인이 된 후 어디서도 쫄지 않을 자기애를 준다. 물론 자라서 얻은 이런 경험들 역시 똑같이 소중하다. 믿음이 있는 관계는 단단하고 건강하여 어떤 확인도 필요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다신 너랑 안 볼 거야! 따라오지 마! 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조심스레 찔끔 돌아본 곳에 상대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서 있어주는 체험 같은 것.
이지안은 이 어린 시절의 절대적 신뢰와 무조건적 애정이 없는 불운을 겪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고맙습니다' 한 마디가 어렵기도 하다.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듯 행동하지만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상처 입고 신경 쓰고 있기도 하다.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있을수록 사람에게서 깊게 슬픔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얼마나 다른 사람의 아픔이 많이 잘 보이고, 그 서러움에 공감하여 자기 일처럼 아파했던 사람이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니까
"당신은 좋은 사람 같아요. 슬퍼 보여서요. 슬픈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게 다 모든 것을 세심히 느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자랑스러운 한국인 오미주 씨(산드라 오) 주연의 영드 <킬링 이브> 1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나오는 대사다. 사이코패스인 빌라넬에게 빌라넬의 친구이자 핸들러인 콘스탄틴의 어린 아기가 건넨 말.
세상 사물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아름다움도 크게 느낄 수 있지만 상처도 크게 받고 슬픔도 깊게 느낀다.
유난히 세상 힘든 사연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나중에는 점점 부러워진다. 나에게는 저렇게 조용히 뒤에 버티고 서 있어 주는 사람이 아직 많은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갈 수 있는 어른이 있는가. 누군가의 뒤에 계속해서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살면서 나를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건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지안이와 후계 사람들처럼.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지안이가 감사의 인사를 후계 사람들에게 건네게 됐을 때와, 그 순간 동훈의 표정. 그런 장면들은 이 드라마의 팬들을 많이도 울렸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는 외롭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작고 아픈 방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저마다 홀로 삼켜본 슬픔의 시간, 그 안에 잠겨있는 마음을 알기에 누군가가 아파할 때, 그래 네가 참 고생했겠구나 하고 도닥일 수 있다.
늘 옆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그저 캐묻지 않고 도닥일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 너는 좋은 사람이라는 신뢰, 그러한 연대로 우리는 기왕 내던져진 세상에서 서로의 다친 마음을 도닥이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