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투자분석회사의 간부인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렇게 큰 슬픔을 표현해야 할 사건은 처음 겪는데, 날것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의사의 사망선고는 믿기지 않는다.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고 다음 날에는 회사에 출근했다.
나를 압도하는 슬픔을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슬픔 없이 자라는 동안 자주 사람들이 슬플 때 하는 행동을 드라마로 학습해왔다. 그들은 부정하고 소리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서 울거나 다른 사람에게 한없이 그 감정을 털어놓고 의존했다. 진짜 압도적인 슬픔을 겪게 될 때도 그렇게 우리가 봐온 대로 하게 될까?
이 영화에서 데이비스는 우리가 미디어에서 학습해오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이 영화 속 데이비스의 장인은 정말 보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장인은 데이비스에게 말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해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마음도 똑같아."
그래서 데이비스는 냉장고를 분해하고, 벽을 부수고, 몸을 다치며 닥치는 대로 부수고 파괴해서 그 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려 했다. 장인어른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시계까지 분해해보고 싶다고 미친놈처럼 말한다.
세상에서 학습된 감정 표현대로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오는 일에 익숙하다 보니 대처할 줄 몰랐던 슬픔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날것 그대로의 감정으로 마주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모든 슬픔은 결국 직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형태로 분출되거나 언젠가 곪아 터질 테니까. 다 아는 사실이지만 슬픔에 잠겨 있을 땐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간이 약인 것은 맞지만, 그 시간을 견디어내며 나가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일에 몰두하여 슬픔을 잊어보려고 했다가는 그 양만큼의 슬픔을 어차피 미뤄두었다가 나중에 겪어야 한다. 올라가려면 바닥을 치라거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도 사실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들여다보고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어야만 우리는 그 슬픔에서 언젠가 탈출하거나 무디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흐르고 다른 일로 덮어내어도 나아지지 않는 상처도 있다고 하더라. 결국 선택은 불가하다. 우리는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그 물살을 겪어내어야만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날것의 슬픔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데이비드는 캐런(나오미 왓츠)에게 공허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슬픔을 재단당해도 그만이며, 어쩔 줄 몰라 예의를 담아 나를 위로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슬퍼하는 모습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같이 이 파도에 압도 당하지도 않을 상대로서 적당하니까.
손쓸 길 없는 압도적 슬픔을 겪고 있을 때 어쩌면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것은 캐런처럼 그저 들어주는 낯선 존재, 그리고 캐런의 아들 크리스(유다 스위스)처럼 아픔에 공감해주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크리스는 자기 세상에서 버거운 만큼의 고통을 갖고 데이비드를 그저 지켜본다.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다면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어떤 슬픔을 겪었거나 앞으로 자연스러운 인생의 순리대로 상실을 겪더라도 이것이 나만 겪는 일은 아닐 거라는 것. 그저 인생에서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맞는 사건이므로 그저 슬퍼하는 것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개인적으로 필라테스나 발레, 요가 같은 운동을 하면, 격한 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 몸에 붙어있지만 그게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신체부위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대로 쓸 줄 몰랐던 근육을 느끼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가장 기본적으로 내가 늘 하고 살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호흡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이 과정이 다른 운동을 제대로 하게 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굳이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내 몸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고 내 몸 구석구석을 인식하는 과정은 굉장히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음도 똑같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이 내 날것의 마음을 지우고 살아가게 된다. 놀라고, 웃고,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마음의 표현을 언어로 해내지만 우리는 그 날것의 형태를 사실 잘 모른다. 날것의 내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하고, 내 마음을 내가 잘 알아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몸 쓰는 법을 배워가는 것처럼 마음에도 그런 훈련과 발견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어느 날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외롭게 자랐고 살면서 외로운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외로운 마음이 가끔 들어도 당황하거나 압도되지 않는다고 한다. 외로운 마음이 들 때는 그저 아 외롭구나 또 그런 마음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아픈 일을 좀체 많이 겪어보지 않았다가 들었던 그 말은 왠지 모르게 큰 위안이 되어 아직도 든든함이 되어준다.
어쩌면 너무 행복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하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 그런 무의식 중에 강요당한 세상의 생각 때문에 내가 부정적 감정을 체험할 때 너무 '이러면 안 된다, 이것은 가혹하다, 왜 내게' 하는 생각에 동요하고 발버둥 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려놓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줄어들 슬픔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슬픈 상실을 많이 겪어야 할지 모를 그런 인생의 시간대를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으니까.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런 생각들과 전혀 별개로 데이비스가 크리스에게 했던 비속어와 관련된 충고이다. "넌 '존나'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 '존나'라는 말은 멋진 말이지만 자주 쓰면 그 의미가 흐려져. 그리고 그 말을 쓰는 네가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