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들에 조금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우리는 어긋나지 않고 행복했을까
라라랜드는 뮤지컬을 오글거려 하는 사람도 즐겁게 볼 수 있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뮤지컬 특유의 과하게 비장한 느낌이 없고 대사 중간에 시작되는 노래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넘버가 좋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겠지요!
회색도시를 노을빛으로 물들이는 사랑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꽉 막힌 차로에서 시작하는 영화, 회색빛 교통체증 속에서 차문을 열고 등장한 댄서의 춤과 노래는 곧 군무가 되고, 화사해진 거리에 널린 차들의 문이 다시 닫히고 '겨울'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윈터, 스프링, 써머, 다시 윈터, 그리고 5년 후가 되기까지, 사계는 야자수와 노을이 비비드하게 수놓인 하늘신에서 시작되며 늘 등장인물의 복식은 여름입니다.
풍성한 노을과 야자수, 천혜의 환경으로 묘사되는 배경 '라라랜드'에는 대놓고 경제 부흥기와 고전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는 듯 합니다만, 뒤로 가면 이 환상적인 도시의 아름다움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시선"으로 본 판타지였다는 암시도 나오는 듯 합니다. 시대가 1950년대인가 싶다가도 엠마스톤이 초반 통화 신에서 들고 있는 아이폰을 보고 아 시대배경이 언제인거지 하고 혼란이 옵니다.
[매 문장이 스포일러입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은 절대 피해 주세요!]
겁쟁이 남자와 징징이 여자
레스토랑 겸 바에 일방적으로 고용돼 지시받은 곡만을 연주해야 하는 세바스찬은 정신승리의 아이콘입니다. 지시를 받고 일하지만 협의를 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하고, 미아가 신청한 곡은 자존심이 상해 연주해주지 않습니다. 재능이 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사무칩니다.
연주하고 싶은 곡을 멋대로 연주한 뒤 사장에게 잘려서 돌아나오는 길에 연주를 알아주는 단 한명의 청중을 마주치지만 어깨를 툭 치고 스쳐지나가 버립니다.
거칠고 굳건하게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세바스찬은 겁쟁이였을 겁니다.
6년째 오디션을 전전하는 미아. 오디션을 보고 있으면 누가 들어와 맥을 끊기도 하고, 자신은 엉엉 울고 있는데 앞에서는 낄낄 웃고 있기도 합니다. 한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나가보라는 말도 듣습니다. 설욕의 기회는 좀처럼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두 연인은 우연히 서로를 알아보고 마법처럼 사랑에 빠집니다.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바보같은 파티에 참석해 꿈을 좇다가 마주쳐 툭탁대는데, 겁쟁이와 징징이답게 '너는 내 타입이 아니' 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내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 라라랜드의 풍성한 노을 아래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OST 가사처럼요.
City of stars, Just one thing everybody wants.
There in the bars and through the smokescreen of the crowdwd restaurants.
It's love.
A rush (우연히 마주쳐)
A glance (바라보고 눈길을 주고는 알아보고)
A touch (서로 맞닿아)
A dance (함께 춤을 추는)
고전미돋는 영화답게 사랑에 빠지고, 보고싶어하고, 손을 잡는 과정이 요즘영화같지 않게 더디고 순수하게 그려집니다.
Here's to the hearts that ache (아픈 가슴들을 위하여)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를 쏘아올리는 활이 되어 줍니다. 안정적인 남자친구가 있던 미아는 자신의 꿈을 이해하고 '이유없는 반항'을 보라고 하는 세바스찬에게 구둣발로 밤길을 달려갑니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원하는 음악을 하도록 격려해줍니다. '조지 마이클'이라 부르며 칭찬합니다.
현실은 차디찹니다. 밴드는 생계수단이지 세바스찬의 꿈이 아니고, 미아는 오디션에서 한 문장의 마침표를 채 찍기도 전에 수고했으니 나가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세바스찬의 밴드는 유명해지지만 투어로 얼굴을 볼 새도 없는 두 사람의 골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점점 깊어집니다. 정성스레 굽다가 오븐에서 이지러져버린 세바스찬의 디저트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냅니다. 미아가 준비해온 연극이 흥행에 참패하고, 대관료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터뷰가 늦어져 연극이 끝난 후에야 도착한 세바스찬. 미아는 급기야 도시를 떠납니다.
크게 싸워도 서로 애잔히 여기는 것이 여느 연인과 같아, 세바스찬은 홈홈(본가)으로 간 미아를 찾아냅니다. 츤데레같은 세바스찬이 멋졌던 대목 중 하나입니다.
"우리집은 어떻게 찾았어?"
"집 앞에 도서관 있다고 했잖아."
두 번째 만남에서 미아가 스치듯이 지나가며 얘기한 것을 세심하게 기억했던 것이지요! 여자를 위해 집을 짓고 기다렸던 노트북에서도 그렇고, 라이언 고슬링은 뭐랄까, 말없고 굳건한 순애보 전문 배우인 듯 합니다.
꿈과 현실과 기약없는 약속, 어긋남
마치 시소의 양끝에 탄 것처럼, 함께 수렴하지는 못하고 서로 오르락 내리락, 서로를 밀어올리며 위 아래로 평행선을 그리는 두 사람. 서로의 활이 되어 서로를 쏘아올려주지만 두 사람의 어긋남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세바스찬은 미아가 오디션에 참고할 영화를 보게 해 주고, 받지 못한 연락을 대신 받아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계단까지 태워다줍니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훗날 열 바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서로 다른 곳에 속한 채로 서로를 끌어주고 쏘아올려주다 어느덧 유럽에서 활동하게 된 여자와, 여자의 바람대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했던 남자. '흘러가는대로 둬 보자' 이 기약없는 약속에 연인은 어느새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함께 "이유없는 반항"을 관람했던 영화관이 문을 닫게 되는 것처럼 그저 흘러가는 일일 뿐입니다.
사랑의 끝, 노래가 사라지고 빛 바랜 도시
5년 후, 야자수와 눈부신 노을의 하늘은 현수막이었던 걸로 드러납니다. 스태프들이 환상적인 하늘 그림을 걷어내고, 현실 하늘 밑에 미아가 나타납니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있는데다가 딸까지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사계절 내내 따사로운 라라랜드는 어쩌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시선으로 본 도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빠져 세상이 핑크 찬란한 노을빛으로 보이는 현상. '낮에 보니 조악한' 그리니치 천문대 속 가짜별빛 아래 두 사람이, 샤갈의 그림 속 연인처럼 땅에서 발이 떨어진 채, 우주 속에서 날아다니며 춤추듯 환상적으로 보였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우주 안에 다른 모든 것은 환상적인 색채로 페이드 아웃되고 단 둘만 남는 것처럼. '별의 도시'는 두 사람만을 위해 빛나던, 두 사람이 만든 환상일까요.
이 암시는 오디션에서 미아가 부른 노래 가사에도 나타납니다.
꿈을 좇아 배우가 되고, 알코올 중독으로 허망하게 떠난 이모가 되돌아가도 같은 선택(꿈을 택하는)을 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She captured a feeling
Sky with no ceiling
The sunset inside a frame
(이모는 이모의 감정과 천장없이 무한한 하늘과 노을을 액자 속에 가두었습니다)
이모가 그랬듯 미아도 도시의 별빛과 노을빛을 과거로 묻고 떠납니다.
Here's to the ones who dream(꿈꾸는 자들을 위하여)
Foolish as they may seem(바보같아 보일지라도)
Here's to the hearts that ache(아픈 가슴들을 위하여)
Here's to the mess we make(우리가 만들어내는 혼란들을 위해)
그녀의 딸은 세살이에요
급격히 현실로 돌아와, 미아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채로 재회한 두 사람. 운명은 참 얄궂습니다. 미아 부부의 목적지는 원래 그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딸을 내니에게 맡기고 오붓하게 외출하였다가, 차가 막혀 일정을 변경해 근처에서 저녁이나 먹고 나와, 걷던 길에서 들리는 재즈 음악소리를 따라 지하 재즈바로 들어갑니다. 모두가 예상한대로 그 바는 세바스찬의 바입니다. 세바스찬은 미아가 정해준대로 아포스트로피가 음표 그림인 "셉스(Sebs)"를 오픈하고, 꿈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사라지고 노을이 사라진 도시, 노랫소리가 들리는 지하로 홀리듯 따라 내려가보니, 그 곳에는 액자에 가두어 두었던 노을빛 과거가 있었습니다.
Epilogue
무대 위의 세바스찬은 객석의 미아 부부를 보고 일순 놀라지만 언젠가 예상한 일처럼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세바스찬이 피아노를 치면서 평행우주 세계처럼, 어긋남의 순간마다 다른 선택을 하는 연인의 행복한 모습이 플레이됩니다. 사소한 선택과 사소한 어긋남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세바스찬이 꿈을 포기해야 했을까요? 두 사람이 아직까지 행복한 가상의 그림에는 세바스찬의 회한이 가득합니다. 처음 만난 순간 자신의 연주를 알아봐준 미아에게 자존심 때문에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면. 친구가 밴드를 제의해왔을 때 거절했더라면. 미아가 유럽으로 떠날 때 함께 갔더라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자고 하지 말고 잡았더라면.
다른 선택들을 했더라면 행복했을 지금을 떠올리며 연주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세바스찬과 미아. 바를 나서다 뒤돌아보는 미아에게 세바스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미아는 슬프게 웃어보입니다. 다른 어떤 설명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재회. 씁쓸하고 슬프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 이렇게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음악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