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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an 25. 2017

초속 5센티미터

짧은 인연에 그리움은 왜 그리 길었을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




"초속 5센티미터"(2007/신카이 마코토)



말도 안 되는 짧은 인연에 그리움은 왜 그렇게 길었을까.



폭설로 열차가 지연될 때마다 한숨을 함께 삼키다가 기어이 만났을 때의 쾌감.



한 번만 다시 만나서 함께 벚꽃을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과

만날 리 없는 어느 장소에선가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멀리 있는 인연에 너무 조심스러워 이루어지지 못한 아픈 첫사랑.






초속 5센티미터는 2000년 초반부터 1인 체제로 장편 애니를 제작하기 시작하다가 본격 애니계에 입성한지 십여년 만에 일본 애니매이션 최초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며 장인 기염을 토하는 중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표작이다.



'너의 이름은'의 반응이 지금 워낙 뜨겁고 장인의 정성이 듬뿍 담겼지만 개인적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중 작화는 '언어의 정원'이 최고였다고 생각하고, 초속 5센티미터가 영화적 완성도가 가장 높고 구성이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세계관이나 인연에 대한 정리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담고 있다. 대사들도 아름답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 돼 있는데, 중간 에피소드에 약간 우리 정서에는 낯설게, 일본 감성을 너무 짙게 띠는 짝사랑 여자 캐릭터가 나오긴 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담백하다. 세심한 시각 묘사 때문에 주인공이 서 있는 장소에서 주인공이 느끼고 있을 오감적 체험이 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느낌이 들 정도다.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를 보다보면 빛, 기후-기온, 바람, 눈, 비 같은 것이 우리 정서와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체감하게 된다.




[결말을 명확하게 서술하는 스포일러와 지나친 개인적 견해가 있습니다]




일부 일본/대만 청춘 영화에서 보이는, 중고등학교 때의 인연을 성인이 돼서도 '지나치게' 못 잊거나 너무 비장하게 인연에 집착하는 설정을 좋아하진 않는다. 동북아 특화 첫사랑/인연 감성을 좋아하진 않는데,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주인공들의 감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 중학생의 사랑이든 고등학생의 사랑이든 설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느냐 하는 실제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절에 그 일을 겪은 주인공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떤 아름다운 텍스트로 사랑을 묘사하고, 그 감정선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얼마나 주인공들이 멋지게 교감했고 그 교감에 공감이 되고, 이런 것이 영화 속 사랑의 완성도를 가른다.



초속 5센티미터 속 주인공들의 감정은 충분히 상식선에서도 공감할만한 이야기인데다, 세심한 언어들로 묘사 돼 있어 마음에 와 닿는다. 어린 두 사람이 서로 진심을 확인했음에도, 영화 속 남주인공의 독백처럼 두 사람 앞에는 앞으로 남아있는 세월의 존재감이 숨 막힐 만큼 남아 있었다. 성인이 돼서 직장을 다니고, 다른 연애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하다 만 과제처럼 계속해서 남아있는 첫사랑의 존재감.










밤공기와 눈 내리는 겨울, 벚꽃이 흐드러진 계절, 자연의 변화가 피부와 눈, 귀에 와 닿으며 감정을 매만지는 느낌을 신카이마코토는 늘 믿을 수 없을만큼(단지 2d매체인 영화에서!) 리얼하게 묘사해내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 같다. 생생한 계절의 모습들로 오감을 자극해 감정을 동하게 하는 능력.



설렘과 기다림이 폭설로 지연되는 추운 열차 속에서 조바심과 짜증, 울분으로 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실제 내 오감 체험처럼 느껴지게 묘사 돼 있다. 그래서 남주인공이 몇 시간이나 마음을 졸이다가 늦게 약속장소 대합실에 도착했을 때, 도시락을 가지고 변함없이 그 시간을 기다려준 여주인공을 보고 기어이 눈물을 쏟을 때는 고작 중학생인 소년의 마음고생이 그대로 전해져 함께 마음이 찡해온다.   





겨울에 만난 두 사람, 봄에 함께 벚꽃을 보고싶은 소박한 소망을 품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못 이룬 그 소망이 상징하는 것은 함께 말로라도 꿈꾸어보고 싶은 미래, 영원 같은 것이다. 이루지 못한 그 소망, 조심스러워 차마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한 그 약속은 어른이 되어서도 하다 만 과제처럼 늘 마음 한 켠을 붙잡는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 마음이 곧 내 마음 같다. 그래서 어느 날 정말 벚꽃이 초속 5센티미터로 날리던 봄날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남녀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돌아보는 장면이 숨막히다.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이 벚꽃 날리는 봄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많은 영화들에서 그렇듯 두 사람은 길에서 스치다가 곁눈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스쳐지나가고 난 뒤 뒤돌아본다.

'지금 뒤돌아보면 저 사람도 틀림없이 뒤돌아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주인공이 뒤를 돌아보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철길로 기차가 지나간다. 돌아선 채로 기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 짧은 시간에 주인공은 건너편 철길에 서 있을지도 모를 상대와의 옛 추억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 지나가고 난 뒤, 끝을 향해가는 영화는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철길을 사이에 둔 남녀의 봄으로 다시 온다.



철길 위로 기차가 지나는 1,2분 가량의 시간 동안 관객도 함께 마음을 졸인다. 그토록 길게 느껴지는 짧은 시간이 흐른 뒤 확보된 시야, 건너편 철길에는 아무도 없다.

 


씁쓸하게 돌아서서 흐드러진 봄눈 사이를 걷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토록 가슴 아린 건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우연히 잠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 그리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약지에 빛나는 반지를 끼고 그냥저냥 덤덤하게, 그러나 역시 마음 한 켠의 뭔가를 잃고 있다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을 진행하는 중이던 여주인공은, '철길에 멈춰서서 옛 사랑을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혹시 모를 기대감을 품으며 현재에 전적으로 충실하기 힘들었을 남주인공은 어쩌면 그제서야 씁쓸하게 첫사랑을 끝내고 자유를 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서야 종결된 추억으로 마무리 된 사랑.



그토록 함께 보고싶던, 초속 5센티미터로 내리는 벚꽃잎들. 봄에 내리는 눈 같다. 대지 위에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릴만큼 조용한 겨울밤에 함박눈 사이를 한참 걸었던 소년과 소녀. 해가 몇 번 바뀌고 계절은 변하고 봄눈같은 꽃잎들 사이로, 꽃잎이 만들어낸 핑크색 카페트 위를 소년이 홀로 걷는다. 다 큰 소년의 홀쭉한 뒷모습은 한 때 사랑했고 사랑을 놓친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아프고 한편으론 덤덤하다. 그 모습과 그 감정이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되어 추억하는 첫사랑에 대한 정의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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